고향이야기 사라지는 물광 저수지가 없어서 천수답으로 하늘만 바라보고 농사를 지었던 교동땅에 흉년을 면하기 위해 자구책으로 만들었던 물광들! 얼마전까지만 해도 무학리, 지석리, 난정리, 양갑리에 집중적으로 있었던 물광이 난정 저수지 축조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육지에서 ‘둠벙’, ‘보’란 말은 있지만 물광(꽝)이란 말은 교동에만 전해져 오는 용어일 것이며 우리나라 어딜 찾아 봐도 없을 듯하다. 광이란 곡물을 비롯한 각종 물건을 넣어두는 방 또는 집을 말하는데 벼를 넣어 둔곳을 '볏광'이라고 불렀듯이 물을 가둬두었기에 물광이라고 불리운 것으로 생각이 되고 경음화 현상으로 '물꽝'이란 발음된 것 같다. 물광은 계절마다 추억이 어려 있다. 겨울이면 썰매타기 좋았고, 봄이면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뚝에서 물오른 삘기를 째며 수수깡 찌에 닭장.. 더보기 모내기의 추억 교동은 모내기를 끝내고 푸르름이 더해간다. 4월, 네모진 프라스틱 용기에 고운 흙을 넣고 볍씨를 뿌려 온상에서 키운 모판을 때가 되면 용기와 분리를 해서 트랙터를 이용해 자동으로 모를 심어낸다. 교동의 그 넓은 들판이 불과 보름 만에 연초록의 채색으로 물들여 지는 것이다. 모를 낸다고 해서 과거처럼 많은 사람이 눈에 띄는 것도 아니다. 힘든 일이라면 모판을 떼어 모낼 곳에 운반하고 모와 용기를 분리시켜서 기계에 올려놓는 일일 것이다. 노동력이 부족한 관계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과거처럼 많은 인원이 동원될 일이 없다. 70년대 중반 고구리 저수지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지금과 같이 일찍 모를 내지 않았다. 5월 중순이후 하늘에서 비가 와야만 모를 낼 수 있는 천수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못자리도 너무 일찍.. 더보기 보리밭의 추억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박화목 시인의 시를 가수 문정선에 의해 대중화 되어 불려 질 때만 해도 보리밭의 추억과 낭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릴 적 얘기기도 하지만 보리밭은 그저 생계수단의 터전이자 철모르는 아이들의 놀이터였기 때문이다. 고향땅에는 논에다 보리를 심을 수 없었다. 보리를 베고 나면 그 자리에 모를 내야 하는데 계절적으로 이모작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 가까운 밭에다 주로 보리를 심었는데 보리이삭이 패는 시기이면 대부분 가정에서는 묵은 곡식이 떨어져서 양식 걱정이 컸고 그것이 바로 보릿고개의 시작이었다. 한창 보릿대가 올라올 때면 풋 내음이 상큼 나는 굵은 보릿대를 쭈욱 뽑아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그 끝을 잘근 씹어 호드기를 만들어 불고 다니는 재미가 있었다. 보리밭 마다 드문드.. 더보기 봄의 전령사-삘기 삘기! 너무 정감이 넘치는 봄의 전령사 이다. 넓은 벌판에 아지랭이 아른 아른 피어 오르고 미풍이 피부를 간지를 때면 새싹들의 행진이 시작된다. 달래,냉이,민들레,씀바귀,쑥,소루쟁이.... 특히 물꽝(?)이 많았던 교동은 정월 보름에 쥐불로 새카맣게 태운, 촉촉히 젖은 뚝마다 빨간색을 띠고 삘기가 삐죽이 고개를 내민다. 삘기는 '띠'라는 볏과의 여러해살이 풀의 어린싹인데 쇠게 되면 억새 모양의 흰색꽃이 줄기 끝으로 피어난다. 그래서 꽃이 피기전에 뽑아서 째보면 물오른 하얀 속살이 드러나고 그걸 씹으면 쫄깃 하면서 달착지근한 맛이 어린 입맛에는 그만이었다. 이걸 놓칠 동네 어린아이들이 아니었다. 일년을 기다려 왔는지도 모른다. 삘기는 나오자 마자 얼마있지 않아서 쇠기 때문에 물이 오른 제때에 먹어야 했다... 더보기 고향의 갯벌 교동의 남쪽바다! 섬이라면 동서남북이 바다로 둘러 싸여 어느쪽을 가든 갯벌을 접할 수 있겠지만 교동은 북서쪽 바다가 남북이 분단된 휴전선 지역이라 자유롭게 갯벌을 접할 수 있는 곳은 동남쪽으로 제한되어 있다. 마을마다 조그마한 동산을 배경으로 형성되어 애환을 같이 해 왔듯이 바다 또한 그러했다. 어릴적 땔감이 무척이나 귀한 시절에는 여름철 장마로 육지에서 홍수라도 나면 한강,임진강,예성강에서 떠내려 오는 목재가 엄청났고 집집마다 바다에 나가 갯벌위에 막대기를 양쪽에 꽂아 자기 소유임을 주장했고 서로 다투는 일도 있었다.붉게 물든 거센 파도에 집이 통채로 떠내려 가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무서움도 있었지만 그만큼 호기심도 많은 법. 바다로 나가보면 참으로 다양한 물건들이 갯벌에 떠내려 와 있었.. 더보기 화개산 약수터 화개산 약수터! 화개산 정상 부근의 약수터는 초등학교시절 봄 소풍가는 단골 장소였다.왜냐하면 여러사람이 물을 마실 수도 있었고 정상에서 앞에 펼쳐진 들판과 바다와 북녁땅등은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그 곳만의 장관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었으리라. 뿐만아니라 화개산성 안쪽으로 적당한 경사면과 함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 학생들이 장기자랑이나 놀이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늘 점심시간이 되면 선생님 몇 분이 보물찾기 쪽지를 숨기곤 했는데 민둥산에 진달래 숲과 돌틈사이에 끼어 넣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니 약싹 빠른 놈들은 어디에 숨겨 놓았는지 다 알고 있었고 하도 잽싼 놈들이 있었기 때문에 보물찾기 게임에 들어가면 5분도 안되어 싱겁게 끝나버리곤 했는데 어리숙한 나는 한번도 보물찾기 쪽지 찾아 공.. 더보기 화개산의 추억(2) 화개산! 그 당시에는 송충이도 많았다. 정말 크기도 컸다. 숭숭 나있는 흰털이 피부에 박히면 퉁퉁 부으면서 알레르기가 발생하고 뜨끔뜨끔 아팠다. 벌거숭이와 같은 산에 별로 크지도 않은 소나무가 그나마 송충이로 말라죽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산림녹화라는 정부의 정책에 의해 학생들까지 총 동원하여 송충이 잡이에 나섰다. 송충이 잡이의 준비물은 나무젓가락이나 직접 만든 나무집게와 깡통이었다. 쓰물 쓰물 기어가는 큰 놈을 집게로 집으면 이거 놓으라는 듯 지랄 발광을 하는데 마치 털 달린 미꾸라지가 꿈틀대는 것 같아서 소름이 끼쳤다. 고향에서 송충이를 본 이래로 지금까지 그렇게 큰 송충이를 본 기억이 없다. 초여름이면 아카시아 꽃 향기가 온산을 감싸 돈다. 약간 비릿하면서도 달콤한 그 꽃은 또 얼마나 먹어댔던가! .. 더보기 화개산의 추억(1) 어린 시절... 계절마다 한 번씩 화개산 정상에 올라가곤 했다. 해발 260m밖에 안 되는 산이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높게 보이는 산이었다. 또한 지금은 제법 정취 있는 숲을 이루고 잡목이 우거져서 등산로가 아니면 다니기 힘든 산이 되었지만 그 당시는 민둥산이어서 정상까지는 아무 곳으로든 올라 갈 수 있는 산이기도 했다. 겨울이면 땔감이 귀하던 시절이라 산에 올라 솔방울을 따거나 주워서 학교에도 가져갔고 (갈탄난로의 불쏘시개용)솔잎을 갈퀴로 채취해서 아궁이에 땠다. 지금도 스산한 바람이 솔잎 스치는 소리를 낼 때면 그 때의 기억이 엊그제 일처럼 느껴진다. 특히 설날 명절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엿을 곱는 일이 큰 행사였다. 솥단지의 엿물을 졸이려면 많은 양의 땔감이 필요했는데 산에 있는 잘 마른 그루터기(끌.. 더보기 이전 1 ··· 12 13 14 15 1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