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박화목 시인의 시를 가수 문정선에 의해 대중화 되어 불려 질 때만 해도 보리밭의 추억과 낭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릴 적 얘기기도 하지만 보리밭은 그저 생계수단의 터전이자 철모르는 아이들의 놀이터였기 때문이다.
고향땅에는 논에다 보리를 심을 수 없었다. 보리를 베고 나면 그 자리에 모를 내야 하는데 계절적으로 이모작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 가까운 밭에다 주로 보리를 심었는데 보리이삭이 패는 시기이면 대부분 가정에서는 묵은 곡식이 떨어져서 양식 걱정이 컸고 그것이 바로 보릿고개의 시작이었다. 한창 보릿대가 올라올 때면 풋 내음이 상큼 나는 굵은 보릿대를 쭈욱 뽑아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그 끝을 잘근 씹어 호드기를 만들어 불고 다니는 재미가 있었다.
보리밭 마다 드문드문 깜부기가 있었다. 초록의 싱그러운 청보리밭 물결에 새까만 깜부기는 눈에도 금방 띄었다. 시간이 지나면 검은 가루가 바람에 풀풀 날아가는데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깜부기를 골라 동네 형들이 그걸 따서 먹어 대니 같이 따라서 입에 틀어넣어 게걸스럽게 씹어 먹었다. 모두가 당연히 먹는 식물인 줄 알았다.
입안은 모두가 새까맣게 되어 서로 웃어댔지만 그 맛이 있었는지는 기억할 수가 없다. 이러한 청보리밭은 동네꼬마들 술래잡기 놀이에도 좋았고 저녁 무렵이면 잠자리들의 은신처였기 때문에 특히 키 큰 호밀밭에서 잠자리 잡느라 정신이 없었다. 밀잠자리, 왕잠자리...
그러니 보리, 밀밭이 성할 리 없었다. 어른들로부터 꾸중 듣는 일이 다반사였다. 어느 동네고 길가의 밭에는 보리숲을 이루었기에 뭇 연인들의 연애 장소였기도 한 추억이기도 했으리라. 이숙자 화백의 ‘이브의 보리밭’의 작품을 보면 괜스레 그러한 추억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다. 그 시절 유행했던 속어 중 ‘보리밭에 쿵’이란 말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보리가 익으면 어른들은 보리를 베어 자기 집 마당에 나무 절구통을 옆으로 뉘이고 보릿단을 내리쳐서 보리 이삭을 떨어낸다. 그리고 도리깨질을 하고 바람개비를 돌려 마무리 한 다음 방아를 찧는다. 벼농사와 달리 보리타작이 힘든 것은 더운 초여름도 문제지만 보리 이삭에 붙은 바늘과 같은 보리수염의 꺼끄라기가 어찌나 따가운지 땀과 함께 범벅이 되어 몸에 붙으면 잘 떨어지지도 않았고 따끔거리는 괴로움은 멋모르고 타작한 보릿단 속에서 놀다가 당한 일이기도 했다.
학교 점심시간에 변또(도시락)를 보면 그 집 형편을 알 수 있었다. 어떤 애는 쌀 한 톨 없는 깡 보리밥이었고 어떤 애는 흰 쌀밥만 싸오기도 했다. 그 때는 무슨 보리밥 알도 그리 컸는지 입에 넣으면 미끌미끌해서 입안에서만 빙빙 도는 게 제대로 씹히지도 않았다. 그러니 헛배만 나오고 방귀 뀌는 애들이 많았는지도 모른다. 집에서 보리밥 반찬이라야 별것 없었다. 고추장에 쓱쓱 비비고 감자 나올 시기엔 찐 감자 한개 넣어 비벼 먹으며 짠지 한 쪽이면 그만이었다. 그러니 한창 성장할 나이에 먹고 되돌아서면 배고픈 시절인 것이다.
요즘 애들이야 보리인지 밀인지도 구분 못할 것이다. 그 때의 시절이면 한창 밀청대(밀서리)를 해 먹을 시기이다. 완전히 익지 않은 여물어 가는 밀 이삭을 몰래 베어 불에 굽고 손으로 비벼 티를 후후 불어낸 다음 밀알을 한 줌 입에 털어 넣으면 쫀득쫀득한 맛이 지금도 군침을 돌게 한다.
그러한 보리, 밀밭이 이제는 보기 힘들다. 어쩌다 도심지 도로가의 관상용으로 심어 놓거나 꽃집의 꽃꽂이에 꽂아 놓은 것을 보는 것이 고작이다.
어느 날 우연히 보리, 밀밭이 눈에 띄었다. 그 순간 밀려오는 옛 추억들! 그리고 멈춰선 발걸음... 호밀의 긴 밀대로 장석을 만들어 여름 마당에 모깃불을 놓고 지냈던 추억도 이제 모두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리움으로 남아 이젠 또 다른 낭만이 되어 버린 보리밭. 바쁜 발걸음을 붙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