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네모진 프라스틱 용기에 고운 흙을 넣고 볍씨를 뿌려 온상에서 키운 모판을 때가 되면 용기와 분리를 해서 트랙터를 이용해 자동으로 모를 심어낸다.
교동의 그 넓은 들판이 불과 보름 만에 연초록의 채색으로 물들여 지는 것이다.
모를 낸다고 해서 과거처럼 많은 사람이 눈에 띄는 것도 아니다. 힘든 일이라면 모판을 떼어 모낼 곳에 운반하고 모와 용기를 분리시켜서 기계에 올려놓는 일일 것이다. 노동력이 부족한 관계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과거처럼 많은 인원이 동원될 일이 없다.
70년대 중반 고구리 저수지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지금과 같이 일찍 모를 내지 않았다. 5월 중순이후 하늘에서 비가 와야만 모를 낼 수 있는 천수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못자리도 너무 일찍 만들었다가 비가 안 오면 모가 너무 성장해서 모 윗부분을 잘라내고 심는 일도 있었다.
1년 농사 풍년이면 3년을 먹고 산다는 논마지기들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비가 제때에 안와 흉년이 들면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자구책으로 물광(물꽝?)을 만들어 흉년을 면했는데 물광이 없는 곳은 아예 마른 논에 벼를 파종하는 ‘건파’로 농사를 지었다. 수확은 좀 떨어졌으나 농사를 못 짓는 편 보다는 나았기 때문이다.
6월에 비가 오기 시작하면 본격적인 농번기가 시작되었다.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무자위질과 용두레질을 하고 급하면 학생들까지 노력 동원이 되어 모내기 일손을 도왔다. 비가 시원치 않게 내리면 어른들의 실망은 컸다. 그래서 모험 삼아 말뚝 모를 냈다. 자꾸 커가는 모와 내리지 않는 비를 원망만할 수 없기에 이슬비라도 오면 젖은 논에 말뚝을 살짝 박았다 빼면 생긴 구멍에 모의 뿌리를 집어넣고 흙을 다져 심었다. 그리고 일주일 안에 비가 오면 어느 정도 모가 사는 것이고 안 오면 그해 농사는 망친다고 했다.
모판에서 모를 찔땐 그 것 역시 보통일이 아니다. 모판 바닥을 손가락으로 긁다시피 모의 뿌리를 잡아 당겨서 뽑아야 모가 상하지 않고 모도 잘 뽑혔기 때문이다. 거머리는 왜 그렇게 많은지 모 찌다가 다리를 쳐들거나 정갱이며 뒷다리를 자주 봐야만 했다.
그래도 언제 붙어서 피를 빨아 먹었는지 거머리의 배가 불룩해져 있고 잘 떨어지지 않는 놈을 떼면 다리에서 피가 주루르...
왠만해선 죽이기기도 힘든 놈을 분풀이라도 하듯 가느다란 잡초대를 뽑아 생식기에 꽂고 뒤집어 죽여야만 가능했다.
학창 시절엔 어른들 틈에 끼여 모를 낼 실력도 힘도 없기에 모춤을 나르거나 써레질한 논에 적당히 던져 넣고, 모내는 어른들 뒤에서 남거나 부족한 모를 적당히 분배해 주는 모쟁이 노릇을 했다.
모를 낼 때는 줄잡이가 제일 편했다. 허리를 굽힐 일도 없고 일에 쫓길 일도 없이 간격만 잘 맞추고 제 때에 줄을 넘기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그러니 젊은 사람의 차지가 아니었다.
한번 허리를 굽혔다 하면 실력이 없으면 허리를 펼 시간적 여유가 없다. 뒷 논드렁에 다다를 때까지 허둥대야 하니 옆 사람이 도와주는 인정 속에 맞춰 나가는데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는 표현이 딱 맞는 말이다.
아침 일찍 먹은 음식은 금방 허기가 지게 마련이다. 새참, 곁두리가 아낙네들 머리위에 지고 동네에서 나온다. 양지꽃과 토끼풀 꽃이 어우러져 핀 논두렁에 둘러 앉아 물 비린내를 맡으며 막걸리에, 각종 시골 반찬에, 지나가는 사람도 함께 불러 먹는다. 정말 정감이 넘치는 풍경이다. 지금이야 핸드폰으로 음식점에 시키면 신속히 배달되는 세상... 거기다 커피까지...
매일 새벽밥 먹고 품앗이를 해서 모를 낼 때면 일꾼을 불러 논 규모에 따라 몇 십명씩 무리지어 모를 내는 모습은 벌써 사라진지 오래된 풍경이다.
황소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어르신네들의 음성과 써레질하는 뒤로 울어대는 맹꽁이, 청개구리 소리가 지금도 귓전에 맴돈다.
꽂호미로 온 논마지기를 뒤 집어 김을 매시던 어르신들, 삽, 낫, 호미, 지게, 달구지, 쟁기가 농구의 전부로 농사를 지으신 그 분들이 지금은 깊게 패인 주름에 7~80세의 고령이 되었으니 건강하게 오래 사셨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