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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야기/고향 추억

화개산의 추억(1)

 

 

어린 시절... 

 계절마다 한 번씩 화개산 정상에 올라가곤 했다.

해발 260m밖에 안 되는 산이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높게 보이는 산이었다.

또한 지금은 제법 정취 있는 숲을 이루고 잡목이 우거져서 등산로가 아니면 다니기 힘든 산이 되었지만 그 당시는 민둥산이어서 정상까지는 아무 곳으로든 올라 갈 수 있는 산이기도 했다.

겨울이면 땔감이 귀하던 시절이라 산에 올라 솔방울을 따거나 주워서 학교에도 가져갔고 (갈탄난로의 불쏘시개용)솔잎을 갈퀴로 채취해서 아궁이에 땠다. 지금도 스산한 바람이 솔잎 스치는 소리를 낼 때면 그 때의 기억이 엊그제 일처럼 느껴진다.

특히 설날 명절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엿을 곱는 일이 큰 행사였다.  솥단지의 엿물을 졸이려면 많은 양의 땔감이 필요했는데 산에 있는 잘 마른 그루터기(끌텅)가 제격이었다. 화력이 좋으면서도 오랫동안 은근히 타기 때문이었다. 해마다 채취해 가는 그루터기는 많지는 않았지만 엿을 먹는다는 즐거움에 힘든 줄 모르고 그야말로 신나게 땔감을 모았다.

심지어 바짝 마른 쇠똥도 좋은 땔감이었다. 외국의 네팔등 고산지대 나라에서 가축의 배설물을 채집해서 묽게 만들어 벽에 발랐다가 마르면 땔감을 쓰는 것을 TV로 보고 크게 공감했다.

용돈으로 군것질하기가 매우 어려운 시절이라 봄기운이 대지를 감싸 돌고 산과 들의 야생식물이 땅을 비집고 나올 때면  입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는 희망으로 몸에 기운이 나는 듯 했다.

호미, 삽과 괭이를 들고 산을 오른다. 먹을 것을 캐기 위해서였다. 꼭 배고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자체가 즐거움이었기 때문이리라. 주로 잔대 (교동방언:겨라구), 솜양지꽃(방언:뽕구지)등은 한 삽 뜨면 캘 수 있는 것들인데 그 자리에서 대충 옷에 쓱쓱 문지르고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씹으면 흙내음과 함께 쫄깃하면서 아삭아삭하고 달착지근한 게 맛이 일품이었다.

진달래꽃이 만개하면 새콤달콤한 맛에, 시금치처럼 생긴 싱아는 그 신 맛에 진저리쳐 가며 씹어댔다. 줄기가 올라오는 뻐꾹채(방언:뻐꾸기 나물)와 이름 모를 식물들의 줄기를 한 움큼씩 꺾어 쥐고 다니며 벗겨 먹었다. 특히 지금은 보기 어려운 멱쇠채(방언:접동나물 )꽃 밑둥을 입으로 뚝 잘라 먹는 맛도 괜찮았다.

소나무에 물이 오르면 일명 송기라는 적당한 굵기의 가지를 꺾어 껍질을 하얗게 벗겨 먹는데 단 물만 빨아 먹고 버리면 될 것을 정신없이 먹고는 다음날 변비에 걸려 피똥을 누운 사람이 어디 한 둘이었으랴!  그런 것에 비하면 소나무의 송화(솔밥)는 너무 너무 부드러운 식품이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 입술은 시시때때로 먹는 식물 또는 열매에 따라 색깔이 달라졌다.

 

지금에 와서 그 당시를 미개하다고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가 무공해 식품을 찾으며 신토불이를 외치며 건강식을 위해 생식을 하는가?

 빠지지 않는 뱃살을 움켜쥐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한탄하고 있지는 않는가.

전국이 산업의 발달로 오염되지 않은 곳이 없으나  그 어느 곳보다도 청정지역인 교동, 그리고 허파와 같이 숨쉬는 화개산! 

교동이 고향인 우리들이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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