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11일(화)
수원화성(水原 華城)에 가본 지가 10년이 넘었다. 군 동기생들의 모임으로 방문하였을 때 수원에 아름다운 성이 있음을 알고 꼭 한번 날을 잡아 다시 가보겠노라고 한 것이 너무 긴 세월이 지났다.
알고 보면 전철로도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인데 관심 밖이다 보면 이렇듯 뭐든지 잊고 살게 된다. 가을이 가기전에 이곳저곳 트레킹 대상지를 물색하다가 수원화성을 떠올리게 되면서 바로 출발하게 된다.
♣코스: 팔달문-서남암문-서장대-화성행궁-정조대왕동상-서북각루-화서문-장안문-화홍문-동장대-창룡문-봉돈-동남각루-남수문-팔달문
♣거리: 약 9km(수원행궁 포함)

▽ 팔달문
조선시대의 성문으로, 수원화성의 남문이며, 대한민국의 보물 제402호, 사적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의 22대 임금인 정조 18년(1794년)에 정조의 부친되는 사도세자의 원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이장할때 다른 수원 화성 성곽과 함께 건립되었다. 팔달문이란 이름은 수원 중앙에 위치한 팔달산에서 따 왔다.
화강암으로 된 석축에 홍예문(虹霓門)을 내고, 그 위에 여장을 돌린 다음 2층 누각을 세웠다. 누각은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에 우진각지붕의 건물이다. 아래층과 위층의 공포는 다포식이며, 쇠서의 끝이 강하게 위로 솟아 있고 살미첨차의 끝이 장식화되어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목조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 팔달문관광안내소로부터 성안쪽 길로 문화탐방 환종주를 시작해 보기로 한다.

▽ 수원화성은 1794년(정조 18년) 2월에 착공하여 1796년(정조 20년)에 축성된 것으로, 성곽의 총 길이는 5.74km에 달한다.
지금의 화성시 안녕동에 융건릉을 조성하면서 그 일대에 있던 수원도호부의 읍치를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만든 계획도시로, 화성의 축조는 정조의 업적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당시 화성 건설에 관한 모든 과정은 《화성성역의궤》라는 책에 모두 담겨 있다.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으로써, 한국의 세계적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수원 화성의 그 방대한 공사를 2년 9개월이라는 단기간에 끝낼 수 있었던 것은 규장각 문신이었던 정약용이 동ㆍ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참고하여 축조하는 등 특히 당시에 거중기와 같은 신기술을 도입하였기 때문이다.

▽ 성벽을 따라 계단을 오르다보면 중간에 이와 같은 길이 나오는데 잠시 성밖을 나와 촬영해 본 팔달산로(八達山路)이다. 성안 북쪽으로 진행하면 세종대왕동상이 나오고 남쪽으로 가면 수원시민회관과 중앙도서관이 나온다.

▽ 만추의 곱게 물든 단풍이 아직 지지 않은채 눈길을 사로잡는다.


▽ 이곳에서 잠시 시내를 조망해 보는데 팔달문과 그 멀리에 살짝 동남각루(東南角樓)가 보인다.

▽ 성곽을 따라 이동하다 보니 지난 겨울에 폭설로 이곳에도 여지없이 피해를 입은 소나무들이 많아 운치있었던 풍경이 훼손되어 안타까운 마음이다.

▽ 남포루(南砲樓)를 지나 서남암문(西南暗門)에 도착, 성밖을 나와 촬영해 봤다.
서남암문은 화성 서남쪽에 낸 비상 출입문이다. 화성의 5곳 암문 가운데 유일하게 문 위에 군사들이 머무는 포사(舖舍)를 세웠다.
이곳은 지형상 적에게 빼앗기면 성안이 노출될 우려가 있어서 특별히 포사를 만들어 침입을 대비했다. 암문에는 화공에 대비하여 오성지(다섯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물을 담는 통)도 설치하였다. 이름은 암문이지만 성 안팎을 드나드는 통로가 아니라 용도를 거쳐 서남각루(화양루)로 나가는 문이다.

▽ 남쪽으로 190m 쯤 가면 서남각루(西南角樓)가 나오는데 그곳 탐방은 시간관계상 생략하기로 한다.

▽ 탐방로 옆에 세워진 3.1독림운동기념탑

▽ 걷기 편하고 운치있는 성안 길

▽ 서삼치(西三雉)
서3치는 서포루와 서남암문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이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다. 성벽에 8곳,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서3치 바깥은 지형이 비교적 평탄하여 팔달산에 설치한 다른 치성에 비해 길이가 길다. 치성 안쪽으로는 여장에서 1m 정도 돌출한 담을 쌓고 가운데 출입구를 냈다. 적대와 비슷한 구조는 서3치와 남치에서만 볼 수 있다. [안내문]

▽ 성밖에서 본 서3치(西三雉)

▽ 서포루(西舖樓)
서포루는 서암문과 서3치 사이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이다. 치성은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화성에는 모두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 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 동2포루, 서포루, 북포루,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했다.
서포루는 서장대 쪽으로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기 위해 만들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동북포루와 형태가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포루 누각은 복원했으나 치성은 원형이 잘 남아 있다.

▽ 세계유산 화성
화성은 조선 시대 화성유수부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수원의 행정기구인 읍치를 팔달산 동쪽 아래로 옮기고, 1794년에 축성을 시작해 1796년에 완성했다. 전체 길이는 5.74km에 달한다. 4개의 성문을 비롯해 망루의 일종인 공심돈(空心墩), 대포를 둔 포루(砲樓), 요충지에 세운 누각인 각루(角樓), 군사 지휘소인 장대(將臺) 등을 두루 갖췄다.
화성은 지형을 살려 쌓는 조선의 축성 전통을 다르면서도, 새로운 방어 시설을 도입한 성곽이다. 실학자 정약용은 조선과 중국의 축성방식을 총망라하여 성곽의 규모와 방어시설, 재료를 계획했고, 자재를 쉽게 들어 올리는 거중기와 튼튼한 수레 유형거를 발명하여 공사 비용도 줄였다. 축성의 모든 과정은 「화성성역의궤」라는 공사 보고서에 꼼곰하게 기록했다.
건축 도면과 축성 기계의 그림, 사용한 재료의 치수와 수량까지 수록되어 있어 현재까지도 「화성성역의궤」를 바탕으로 수리 보수가 이루어지고 있다. 화성은 동서양의 기술 교류를 보여 주는 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지형을 살린 우수한 군사 건축물로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화성은 성곽 뿐 아니라 18세기 말에 만들어진 성곽 도시이자 계획 신도시라는 점에서도 큰 가치가 있다. 서울과 삼남지방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에 자리 잡은 화성에는 경제적으로 부강한 도시를 만들고자 했단 정조의 뜻과 실학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 효원의 종각

▽ 서장대(西將臺)가 눈에 들어온다.

▽ 서암문(西暗門)
서암문은 화성 서쪽 팔달산 꼭대기 성벽에 설치한 비상 출입문이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한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서암문은 성벽을 안쪽으로 90도 꺾어 들어가도록 쌓고 그 사이에 문을 내 바깥에서 알아차리기 어렵다. 화공에 대비하기 위해 오성지나 적을 감시하기 위한 비예 같은 별도의 방어 시설을 두지 않고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살렸다.

▽ 측면에서 본 서장대

▽ 서장대(西將臺)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자리 잡은 군사 지휘소이다. 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 서장대는 군사 훈련 지휘소로 썼다. 서장대는 시야가 트여 있어 멀리 용인 석성산 봉화와 현릉원 입구까지 한눈에 살필 수 있었다고 한다.
서장대는 아래층은 사면 3칸, 위층은 1칸으로 위로 가면서 좁아진 형태다. 아래층은 장수가 머물면서 군사 훈련을 지휘하고, 위층은 군사가 주변을 감시하는 용도로 썼다. 정조는 서장대에서 군사 훈련인 성조(城操)를 거행했는데 1795년의 행사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위층 처마 밑에 걸린 화성장대(華城將臺)의 '시문' 현판은 모두 정조의 작품이다.
1795년 성조가 끝난 뒤 정조는 화성장대 현판의 글씨를 직접 쓰고 만족스럽고 기쁜 마음을 시로 표현했다. 화성에서 유일하게 정조가 지은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 정조는 1795년 수원행차 넷째 날인 윤2월 12일에 서장대에 올라 장용영 외영(정조의 친위군사조직 중 화성을 지키는 부대) 군사들의 훈련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튿날 새벽까지 실시된 군사 훈련을 차관한 후 정조는 군사들을 칭찬하고 견고하게 쌓은 화성 성곽에 대해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날의 훈련을 기념하고자 친히 시를 짓고, 이 시를 현판에 새겨 서장대에 걸도록 하였다. 본래 서장대 2층에 게시되어 있었으나 복제본은 1층에 두었다. 원본 현판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서장대에서 바라 본 수원시내를 시계방향으로 조망해 봤다. 왼쪽 성안 길이 이어지고 오른쪽으로 멀리 창룡문(蒼龍門)이 보인다.

▽ 왼쪽 끝 창룡문에서 오른쪽 동남각루(東南角樓)까지 이어지는 성곽이 한눈에 들어온다.


▽ 서장대에서 북쪽으로 곧장 내려가면 서포루(西砲樓)를 경유하게 되지만 30m 뒤돌아 동쪽 데크계단으로 내려가 화성행궁(華城行宮)을 둘러보기로 한다.
화성행궁은 행궁은 정조가 현륭원(顯隆園: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에 행차할 때 임시 거처로 사용하던 곳으로 그 어느 행궁보다 크고 웅장하며 활용도도 높아 경복궁의 ‘부궁’이라는 말까지 생겨난 곳이다. 화성행궁은 별도로 탑재해 보기로 한다.

▽ 화성행궁을 둘러 본 후 팔달산로를 따라 성곽쪽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정조대왕 동상이 나오는데 단풍이 곱게 물든 산책로가 눈을 즐겁게 한다.

▽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대왕의 동상
정조는 1752년 10월 18일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창경궁의 경춘전(景春殿)에서 태어났다. 형인 의소세자가 3살의 어린 나이로 먼저 요절한 뒤 태어났기 때문에 탄생 당일 영조에 의해 원손(元孫)이 되었다. 의소세자의 장례를 치른지 3년이 지나 세손으로 책봉하였다.
11세 때 아버지 장조(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었으며, 할아버지인 영조가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해 왕통을 계승하게 했다. 1775년부터 1776년까지 할아버지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하였다. 1776년 영조의 승하로 즉위하여, 1800까지 조선의 제22대 국왕으로 재위하였다. 재위 초기 홍국영에게 막강한 실권을 주는 세도정치를 하였으나, 1780년 홍국영을 실각시킨 뒤로는 친정을 하였다. 재위기간은 1776년 4월 27일(음력 3월 10일~1800년 8월 18일(음력 6월 28일) [위키백과]

▽ 다시 성곽을 만나게 되고 성곽과 어우러진 주변의 단풍

▽ 서1치(西一雉) 근방의 성 밖은 억새의 물결이 장관이다. 도심속에서 이런 풍경을 보다니 화서공원의 가을 분위기를 만끽하게 된다.

▽ 서북각루 주변의 풍경

▽ 서북각루(西北角樓)
서북각루는 화성 서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이나, 화성에는 모두 4곳 각루가 있다. 서북각루는 팔달산으로 오르는 경사지에서 성벽이 휘어진 곳에 자리 잡아 서북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래층에는 군사들이 머무는 방에 온돌을 놓았고 위층은 마룻바닥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사면에 널빤지 문을 달고 구멍을 내서 적을 감시했다.

▽ 서북각루에 올라 바라 본 서1치(西一雉)와 서북각루 사이 성외곽에 펼쳐진 화서공원의 억새풍경

▽ 서북각루 위에서 바라 본 수원시내 북쪽 풍경

▽ 진행방향으로도 억새와 단풍이 줄을 잇는다.


▽ 렌즈를 줌인해 본 풍경으로 소나무에 가린 화서문(華西門)과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이 보인다.

▽ 뒤 돌아 본 서북각루

▽ 뒤 돌아 본 성외곽의 서북각루

▽ 화서문(華西門)과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 성안에서 본 화서문(華西門)
화서문은 수원 화성의 서문이다. '화성의 서쪽'이란 뜻이지만 서쪽에는 팔달산이 있어 서북쪽에 문을 두었다. 문밖으로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 높다란 서북공심돈을 함께 세웠다.
조선 시대 건축에는 일정한 위계질서가 있다. 같은 성문이지만 장안문과 팔달문은 높은 격식을 갖춘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한 단계 격을 낮춘 형태이다. 석축의 규모도 작고, 1층 문루에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졌다. 화서문은 창건 당시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어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18세기 건축 기술을 보여준다.
옹성 안 석축에는 공사를 담당한 감독관과 우두머리 석공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서울과 개성, 강화도에서 온 석공이 참여했는데 박상길은 축성이 끝난 후 석공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의 상을 받았다.

▽ 옹성 안에서 본 화서문

▽ 진행하다 뒤 돌아 본 풍경

▽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수원 화성을 구성하는 성채의 일부로 공심돈은 적의 동향을 살핌과 동시에 공격도 가능한 시설로 수원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2011년 보물 제1710호로 지정되었다. 수원시 심벌마크의 누각의 모티브가 바로 이 건물이다.
공심(空心)이란 안이 비었다는 뜻이고 돈(墩)은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주변보다 높으면서 평평한 지대를 가리킨다. 즉 공심돈이란 '내부가 비어 있는 망대'를 말한다.[나무위키]

▽ 북포루(北舖樓)
북포루는 북서포루와 서북공심돈 사이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이다. 치성은 성벽 일부를 돌추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모두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 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 동2포루, 서포루, 북포루,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했다. 북포루는 화성에서 가장 평탄하고 시야가 트인 곳에 있어서 주둔하는 군사의 수도 많고 규모도 크다. '군포루' 라고도 불렀다.

▽ 성 외곽은 장안공원인데 왠 꼬마 열차가 지나간다. 알고보니 수원화성어차로 성곽길 순환열차이다. 온라인으로 예매하고 현지에서도 예매할 수 있으나 성수기에는 매진이어서 타기 어렵단다.
연무대매표소(주소:수원시 팔달구 창룡대로 103번길 20)에서 예매하며 9시40분~17시까지 20분 간격운행(매주 월요일 휴무), 요금은 어른 6,000원, 어린이 2,000원 코스는 연무대-북수문(화홍문)-장안문-화서문-매향교-연무대

▽ 뒤돌아 본 북포루

▽ 곧 이어 북서포루(北西砲樓) 나오고...
북서포루(北西砲樓)
북서포루는 장안문 서쪽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다. 이 중 평탄한 곳에 지은 북서포루가 가장 높다.
포루는 벽돌로 만든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은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상층은 군사들이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누각을 만들었다. 북서포루와 북동포루는 안팎의 지붕 형태가 다르다. 이는 「화성성역의궤」에 수록되어 있는 각 시설물 자재 목록을 바탕으로 복원된 것이다.

▽ 뒤돌아 본 성곽 밖의 북서포루 주변 풍경

▽ 곧 이어서 왼쪽에 북서적대(北西敵臺)와 오른쪽 장안문(長安門)에 가까이 왔다.
북서적대(北西敵臺)
북서적대는 장안문 서쪽에서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방어 시설이다. 화성에는 장안문과 팔달문 좌우에 적대를 설치했는데 현재 장안문에만 남아 있다. 장안문 좌우 적대에는 현안 세 줄을 설치한 반면 팔달문 적대에는 두 줄을 설치했다.
현안은 성벽 가까이 접근한 적의 동향을 살피고 동시에 공격도 가능하도록 만든 시설이다. 적대는 우리나라 성곽 중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다.

▽ 측면의 장안문

▽ 장안문의 내부

▽ 성안에서 본 장안문
장안문(長安門)
장안문은 수원 화성의 북문이다. 정조는 장안의 의미를 '북쪽으로 서울의 궁궐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현륭원(융릉)을 바라보며 만년의 편안함을 길이 알린다' 라고 풀이했다. 문 밖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甕城: 성을 지키기 위하여 성문 밖에 쌓은 작은 성)을 만들고 방어를 위해 좌우에 적대를 세웠다.
장안문은 남문인 팔달문과 더불어 화성에서 가장 웅장하고 높은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2층의 누각은 네 모서리 추녀가 길게 경사를 이루면서 용마루와 만나는 우진각 지붕 형태다. 길고 휘어진 목재를 구하기 힘든 조선 시대에 우진각 지붕은 궁궐이나 도성의 정문과 같은 건물에만 쓰였다.
문루 처마 밑에는 다포(多包)라는 화려하고 정교하게 다듬은 받침 목재를 자 맞췄는데, 다포식 건물은 18세기 이후 궁궐에서도 거의 백년 동안 짓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강원도 출신의 승려 목수인 굉흡이 와서 건설을 도왔다. 서울의 숭례문, 흥인지문과 함께 조선 시대 성문을 대표하던 장안문은 한국 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1975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 옹성(甕城)은 성을 지키기 위하여 성문 밖에 쌓은 작은 성을 말한다.

▽ 옹성에서 바라 본 장안문

▽ 성외곽에서 바라 본 장안문

▽ 북동적대(北東敵臺)
북동적대는 장안문 동쪽에서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방어 시설이다. 화성에는 장안문과 팔달문 좌우에 적대를 설치했는데 현재 장안문에만 남아 있다. 안쪽은 성벽과 같은 높이로 대를 쌓아 군사들이 지키고, 바깥쪽에는 현안(懸眼)이라고 하는 세로 방향의 긴 홈을 냈다. 현안은 성벽 가까이 접근한 적의 동향을 살피고 동시에 공격도 가능하도록 만든 시설이다. 적대는 우리나라 성곽 중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다.

▽ 북동적대에 설치된 화포

▽ 북동적대에서 서쪽으로 바라 본 장안문

▽ 북동적대에서 바라 본 진행 방향의 풍경

▽ 뒤돌아 본 서쪽 방향의 장안문

▽ 북동포루(北東砲樓)
북동포루는 장안문과 동쪽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로푸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다.
포루는 벽돌로 만든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은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상층은 군사들이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누각을 만들었다. 정약용은 중국의 제도를 두루 살펴 화성에 발견된 형태의 포루를 설계했는데, 그 모습이 「화성성역의궤」 와 「정리의궤」 에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 이어서 북수문(화홍문)과 동북각루가 보인다.

▽ 北水門(화홍문(華虹門))
북수문은 화성의 북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이다. 일곱 칸의 홍예문 위로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었는데, '화홍문'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누각은 본래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 시설이지만 평소에는 주변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쓰였다. 수문을 통해 흘러온 물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장쾌하게 떨어지는 모습인 '화홍관창(華虹觀漲)'은 화성에서 꼭 보아야 할 아름다운 경치로 손꼽힌다.
화홍문은 조선 헌종 14년(1848)에 수문과 누각을 다시 지으면서 형태가 약간 달라졌다. 1932년에는 '수원명소보전회'를 주축으로 수원주민이 힘을 모아 10년전 홍수로 무너진 누각을 다시 지었다. 2016년에는 「화성성역의궤」를 근거로 창문을 복원했다.

▽ 북수문의 내부 모습

▽ 진행방향에서 뒤돌아 본 북수문(화홍문)
이곳 일대는 수원8경에 들어갈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수원 8경은 ①광교적설(光敎積雪: 광교산에 쌓여있는 흰 눈), ②팔달제경(八達霽景: 팔달문에서 바라본 팔달산 풍경), ③남제장류(南堤長柳: 수원천 긴 제방에 늘어진 수양버들), ④화산두견(花山杜鵑: 화산 숲 속 두견화 위에서 슬피 우는 두견새 소리), ⑤북지상련(北池賞蓮: 만석거에 핀 아름다운 연꽃), ⑥서호낙조(西湖落照: 서호에 저녁노을), ⑦화홍관창(華虹觀漲: 화홍문 7칸 수문에서 쏟아지는 물보라), ⑧나각망월(螺閣望月: 동북공심돈 위로 뜨는 달맞이)

▽ 북수문에서 위로 올라가니 동북각루(東北角樓)가 나온다.
동북각루는 화성 동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이다. 용두(龍頭)바위 위에 각루를 우뚝 세워 주변을 감시하고 화포를 쏠 수 있도록 했다. 군사시설이지만 아름다운 연못과 함께 있어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많이 쓰였다. 정자의 별칭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다. 정조는 이를 '현륭원'이 있는 화산(花山)과 수원 읍치를 옮긴 땅 유천(柳川)을 가리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방화수류정에는 온돌방 한 칸이 있었다. 보통 군사들의 휴식을 위해 각루 1층에 온돌방을 만들었는데 방화수류정에는 임금을 위해 2층에 온돌방을 두고 창문을 설치했다. 조선 정조 21년(1797) 정월, 정조는 방화수류정에서 활쏘기를 하고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시를 지었다. 지금은 온돌방과 창문이 사라졌지만 원형의 건축물이 잘 남아 있다.

▽ 진행 방향의 성곽으로 멀리 동북포루(東北舖樓)가 보인다.

▽ 바로 아래로는 용연(龍蓮)이 자리하고 있다. 용연은 용의 머리를 닮은 용두바위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이곳 방화수류정이 있는 데가 용두 바위다.

▽ 동북포루로 진행 중에 뒤돌아 본 동북각루와 용연

▽ 이어서 동북포루(東北舖樓)가 나오고...
동북포루는 방화수류정과 동장대 사이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지은 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5곳의 포루가 있는데 동북포루는 지붕의 모습이 조선 시대 선비들이 쓰던 각건(角巾)이란 모자와 비슷해 보여서 '각건대' 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동북포루는 다른 포루에 없는 시설을 갖췄다. 여장과 건물사이를 벽돌로 채워서 벽등(甓磴)이라는 단을 만들고, 누각의 계단도 벽돌로 만들었다. 지붕 양 끝에 올린 용머리 모양의 장식 기와 역시 동북포루에서만 볼 수 있다. 동북포루의 특징을 살려 2019년에 다시 복원했다.

▽ 계속 이어지는 성곽 밖은 억새향연이 길게 펼쳐졌다.

▽ 연무초등학교 울타리의 샛노란 은행나무와 도로색이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답게 느껴지는 길을 걷노라면 어느새 동장대(東將臺)에 가깝게 이른다.


▽ 동장대(東將臺)
동장대는 장수가 군사 훈련을 지휘하던 곳으로 '연무대(練武臺)'라고도 불린다. 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 서장대는 군사 훈련 지휘소로 썼다. 동장대는 대지 전체를 3단으로 나누고 마당 한가운데에 장수가 말을 타고 오를 수 있도록 경사로를 만들었다.
정조는 동장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내려주는 호궤(犒饋)행사를 자주 베풀었다. 화성 축성에 마무리되던 시기인 1796년 8월 19일 감독관과 일꾼 등 2,700여 명이 호궤에 참여했다.

▽ 성밖에는 지도상에도 표기되어 있는 나홀로 은행나무의 단풍이 절정에 이르렀다. 주변에 모여든 시민들이 인생숏 담기에 놀이터가 됐다.

▽ 정비가 잘되어 깔끔한 공원

▽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이 눈앞에 다가왔다.
동북공심돈은 화성 동북쪽에 세운 망루로 주변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이다.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보통 돈대(墩臺)는 성곽과 떨어진 높은 곳에 세워 적을 감시하는 시설이나 동북공심돈은 성벽 안쪽에 설치했다. 외벽에는 밖을 감시하고 화포로 공격할 수 있는 구멍을 곳곳에 뚫었다.
동북공심돈은 3층으로 이루어진 원통형의 벽돌 건물로서 출입문에서 통로를 따라 빙글빙글 올라가면 꼭대기 망루에 이르는 구조다. 이 모습을 빗대서 '소라각' 이라고도 부른다. 정조 21년(1797)정월, 좌의정 채제공은 동북공심돈을 올라가 본 뒤 "층계가 구불구불하게 나 있어 기이하고도 교묘하다" 며 감탄했다. 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절반 이상 무너졌었는데 1976년에 복원해 모습을 되찾았다.

▽ 동북노대(東北弩臺)를 지나고...
동북노대는 기계식 활인 노(弩)를 쏘기 위해 지은 시설이다. 노대는 적의 동향을 살피고 깃발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도 쓰였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있다. 동북노대는 별도의 높다란 대를 만들지 않고 성벽에서 돌출시켜 만들었지만 주변이 평탄해서 시야가 확보되었다. 동북노대와 좌우 성벽이 만나는 지점을 살짝 옵혀 쌓았는데 「화성성역의궤」 에서는 그 모양을 '벌의 허리'와 같다고 표현했다.

▽ 창룡문에 도착,주변을 둘러 보기로 한다.

▽ 성안에서 본 창룡문(蒼龍門)
창룡문은 수원 화성의 동문이다. 창[蒼]은 푸른색을 가리키므로 ‘동쪽 방향을 지키는 신령한 청룡’을 상징한다. 창룡문은 바깥쪽에서 보면 안쪽으로 휘어 들어가는 곳에 자리 잡고 있어, 돌출된 좌우 성벽이 자연스럽게 성문을 보호하는 치성 역할을 한다.
문 안쪽의 넓은 공터는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쓰였다. 조선 시대 건축에는 일정한 위계질서가 있다. 같은 성문이지만 장안문과 팔달문은 높은 격식을 갖춘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한 단계 격을 낮춘 형태이다.
장안문과 팔달문이 2층 문루에 우진각 지붕인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1층 문루에 팔작지붕이다. 옹성은 서울의 흥인지문처럼 한쪽 모서리를 열어둔 형태다. 창룡문 옹성 안 석축에는 공사를 담당한 감독관과 석공 우두머리 이름을 새긴 실명판이 잘 남아 있다. 한국 전쟁 때 문루가 파괴되어 1976년에 복원했다.

▽ 옹성에서 본 창룡문

▽ 뒤돌아 본 창룡문과 왼쪽 멀리 동장대(연무대) 군사 훈련장으로 쓰였던 넓은 공터는 현대는 시민의 품으로 돌아와 아이들이 연날기기는 물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휴식처가 됐다.

▽ 끝없이 이어지는 성안길...

▽ 성문 밖에 곧 농익어 떨어질 듯한 홍시가 주렁주렁...만추임을 알려준다.

▽ 이번에 도착한 곳은 동1포루(東一舖樓)이다.
동1포루는 창룡문 남쪽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 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 동2포루, 서포루, 북포루,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했다. 동1포루는 지형이 평탄하고 조망이 트인 곳에 있어서 적의 움직임을 잘 살필 수 있는 구조로 만들었다. 치성을 길게 내밀었으며, 다른 포루와 달리 기둥 사이에 벽을 치지 않고 사방을 개방했다.

▽ 동포루(東砲樓)
동포루는 동1치와 동2치 사이에 지은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곳의 포루다 있는데 보통 평지에서는 규모를 키우고 경사지에서는 규모를 줄였다. 「화성성역의궤」 에는 균일하게 설계되어 있지만 지형과 주변 여건에 따라 규모와 각 층의 높이를 달리 만든 것이다.
동포루는 산상 동성구간에서 비교적 평평한 곳에 있지만 주변 성벽이 높지 않아 작게 만들었다. 남포루와 마찬가지로 1층과 2층은 낮고 누각이 있는 3층은 높이 3m 이상을 확보했다.

▽ 뒤돌아 본 동포루로 외곽에는 조명장치를 잘 해 놓아 야경도 장관일 듯 하다. 언제 기회되면 야경촬영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다.

▽ 봉돈(烽墩)
봉돈은 봉화 연기를 올려 신호를 보내는 시설이다. 보통 봉화대는 높고 인적이 드문 곳에 두었으나 화성에서는 시야가 트인 동쪽에 설치해 화성행궁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봉돈은 외벽과 내부, 계단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벽돌로 만든 화성의 대표적인 벽돌 건축물이다. 높게 쌓은 대(臺) 위에 횃불 구멍인 화두(火竇) 다섯 개가 있다. 평소에는 남쪽 끝에 있는 화두 한 곳에만 연기를 올리고, 상황에 따라 연기의 숫자를 증가시켜 전쟁 시에는 다섯 곳 모두 연기를 피웠다.

▽ 봉돈의 5개의 횃불 구멍인 화두(花竇)

▽ 시내에 무슨 저리 큰 성당이 있는가 확인했더니 교회더라...
십자가에 붉은 빛이 밝혀져 벌써 해가 뉘엿 넘어 가는 저녁이다.

▽ 동2포루(東二舖樓)
동2포루는 봉돈 남쪽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이다. 치성은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화성에는 모두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윙 동1포루, 동2포루, 서포루, 북포루,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했다.
동2포루는 동1포루와 마찬가지로 사방이 개방된 구조이다. 측면 3칸인 동1포루에 비해 치성이 짧아서 측면 2칸의 건물로 만들어졌다. 「화성성역의궤」 에는 동1포루의 모습만 실려 있다.

▽ 동2포루에서 뒤돌아 본 봉돈과 그 뒤로 동2치(東二雉), 그리고 동포루

▽ 동3치를 지나 동남각루(東南角樓)에 도착했다.
동남각루는 화성 남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다. 동남각루는 남수문에서 동쪽으로 솟아오른 경사지에서 성벽이 휘어진 곳에 있다.
이곳은 풍수에서 안산(案山)에 해당하는데, 봉우리가 일(一)자 모양처럼 평평하여 일자문성(一字文城)이라고 불렀다. 서북각루와 같은 구조로 아래층 군사들이 머무는 방에는 온돌을 놓았고, 위층은 마룻바닥으로 만들었다. 사면에 짐승 얼굴과 태극무늬를 그린 널빤지 문을 달고 활 쏘는 구멍을 냈다.

▽ 이곳 동남각루에서 팔달산의 서장대를 렌즈로 당겨봤다. 제 시간에 이곳까지 탐방할 수 있을까 염려했는데 마칠 수 있어서 다행이다.

▽ 시내 한 복판에 팔달문이 보인다. 경사진 성벽을 따라 남수문을 내려가 보기로 한다.

▽ 남수문(南水門)
남수문은 수원천이 화홍문에서 남쪽으로 흘러 내려와 성곽과 다시 만나는 지점에 만든 수문이다. 수원천 하류 수량증가에 대비하여 9개의 홍예수문으로 되어 있으며 수문 위에는 성밖 적들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포사가 세워져 있어 비상시에는 군사들이 대기하거나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수원천 하류의 범람에 따라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붕괴와 복원을 반복하다가, 1922년 범람으로 인해 최종적으로 무너진 후 한동안 복원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남수문 복원을 위해 지난 2004년 남수문터에 대한 발굴조사에 나섰고, 2012년 6월 복원을 완료하였다. 그러나 미복원 상태인 남수문과 팔달문 사이의 성벽 및 남공심돈은 해당 구획에 위치한 건물 문제 등으로 인해 복원되지 못했다. [나무위키]

▽ 남수문에서 뒤돌아 본 동남각루(東南角樓)

▽ 출발했던 팔달문에 도착, 수원화성의 종주탐방을 마친다. 그동안 궁금했던 수원화성을 나름 꼼꼼이 살펴보니 어떻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갈 만큼 복원도 잘 되어 있고 우리나라 어떤 성(城)보다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늦었지만 만추의 계절에 좋은 풍경과 함께 조상들의 지혜를 비롯,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서 의미있는 하루를 보낸 것 같다.

※ 수원화성행궁 이어서 보기: https://openwindow.tistory.com/7154922
'해외여행 및 트레킹 > 전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수원] 만추의 광교저수지 (0) | 2025.11.12 |
|---|---|
| [철원] 한탄강 주상절리길(잔도) (0) | 2025.11.02 |
| [영광] 백수해안누리길 (0) | 2024.01.22 |
| [부안] 변산마실길 3코스(적벽강 노을길) (2) | 2023.08.27 |
| [부안] 변산마실길 2코스(노루목 노랑상사화길) (1) | 2023.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