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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및 기타/사진추억록

[수원] 화성행궁

2025년 11월 11일(화)

수원화성 전체를 환종주 탐방하며 돌아 본 화성행궁을 정리해 봤다. 오늘날 수원의 발전에는 이러한 역사적인 근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더 크게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이 결국 나라 발전의 근원이 됨을 일깨우게 한다.

수원화성행궁 개요

수원화성행궁(水原 華城行宮)은 1796년(정조 20)에 창건되었으며 2002년 복원에 복원, 대한민국 사적 제478호로 지정되었다. 

화성행궁은 조선 정조 13년(1789)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부 읍치 자리로 옮기고, 원래 수원부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겨 오면서 관청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왕이 수원에 내려오면 머무는 행궁으로도 사용했다.

정조는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켜 위상을 높인 한편, 1795년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르기 위하여 건물의 이름을 바꾸거나 새로 지었다. 1796년에 전체 600여 칸 규모로 완공되었다.

화성행궁은 조선 시대 전국에 조성한 행궁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으며, 건립 당시의 모습이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에 그림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1911년부터 일제에 의해 병원(자혜의원)과 경찰서로 쓰이기 시작하면서 건물이 파괴되어, 현재는 낙남헌과 노래당만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996년부터 발굴조사 자료와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을 바탕으로 복원 사업을 시작해 2002년에 중심권역의 복원 공사를 마쳤다. 2016년부터 화성행궁 우화관과 별주의 발굴조사와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안내문]

 

▽ 화성행궁 입장료 및 관람안내

 

궁궐을 조성할 때는 세 개의 문을 만들고 세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 조성하는 삼문삼조(三門三朝)에 따라 삼문(고문,치문,노문)과 삼조(외조,치조,연조)의 원리로 세워진다. 고문은 궁궐의 가장 앞쪽에 위치한 문으로 외조의 정문이며, 치문은 외조와 치조를 잇는 문, 노문은 치조와 연조를 잇는 문이다.

수원화성행궁에서는 임금이 정사를 보는 봉수당이 중심이 되며 여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3개의 문을 거쳐야 한다. 신하들이 업무를 보는 공간인 외조, 임금이 정치를 하는 봉수당 권역의 치조, 왕실 가족들의 생활공간인 연조 순으로 배치되었다. 

▽ 신풍루(新豊樓)

신풍루는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수원읍의 관청 건물을 세우면서 그 정문으로 지었다. 처음에는 진남루(鎭南樓)라 부르다가 1795년에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면서 이름을 신풍루로 바꿨다.

신풍루는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인 풍패(豐沛)에서 따온 이름으로 제왕의 고향 풍패지향(豐沛之鄕)으로서 화성을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정조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건물은 2층의 누각 구조로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쓰고, 위층에는 큰 북을 두어 군사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신호를 보내는 용도로 사용했다. 문루 좌우에는 행랑(行廊 : 대문의 양쪽이나 문간에 붙어 있는 방) 을 두었고, 양쪽 끝에는 군영을 배치해서 경호 체제를 갖췄다.

정조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때 신풍루에서 수원 주민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행사를 베풀었는데, 당시의 행사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 가운데 문은 어도(御道)로, 임금만 지나갈 수 있다.

▽ 앞에 좌익문(左翊門)을 들어가기 전에 오른쪽에 있는 집사청(執事廳)을 둘러 보기로 한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600년이 됐다는 느티나무인데 사람들이 잘못 관리해서 죽은 고목을 행궁과 함께 한 나무로 보존할 가치가 있어 세워 놓았었는데 기적처럼 다시 새 순이 나왔다고 한다. 

한 때는 이 나무에 소원을 비는 종이들이 줄줄이 달려 있어 소원나무라고도 불리웠다는데 이렇게 살아난 것을 보면 영목(靈木), 신목(神木)으로 불릴만 하다.  

집사청 전경으로 북군영으로 이어진 문은 닫혀 있어 관람을 못했다.

집사청(執事廳)

집사청은 1790년(정조14) 창건되었고  2002년에 복원됐다.

관청에서 치르는 제사나 행사를 준비하는 집사들이 근무하는 건물로 조선 정조 14년(1790)에 건립되었다. 정조의 현륭원 행차를 비롯해서 왕이 화성에 내려와 진행하는 모든 행사를 준비했다. 평소에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수령이 화성행궁의 객사(客舍: 조선 시대에 왕의 위패를 봉안하고 공식 행사를 하던 곳)인 우화관에서 올릴 의례를 준비하는 곳으로 쓰였다. 집사청은 우화관 가까이에 있어 효율성을 고려하여 배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집사청에는 조선시대 궁중의상이 진열되어 있다. 그 당시의 관직의상이나 군복, 행사시 예복 등을 살펴볼 수가 있다.

봉수당으로 이르는 두 번째 문인 좌익문(左翊門)

좌익문(左翊門)은 내삼문(內三門)을 바로 앞에서 도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中三門)으로 1790년 3칸 규모로 완공하였다. 행궁의 본전인 봉수당(奉壽堂)에 이르는 두번째 문으로 중양문(中陽門) 앞에 있다. 문의 이름인‘좌익(左翊)’은 '곁에서 돕는다'는 뜻이며, 편액은 정조의 명으로 정동준(鄭東浚)이 썼다. 남쪽 행각의 끝은 외정리소와 연결된다. [위키백과]

중양문(中陽門)

중양문(中陽門)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이다. 1790년(정조 14)에 완성되었고, 가운데의 정문과 좌우의 협문이 있고 좌우로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하였다. 1795년 봉수당 진찬례 때 봉수당 앞으로는 정조와 혜경궁을 비롯한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자리하였고, 중양문 밖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 승지와 사관, 각신이 반열을 이루었던 바 있다.

봉수당(奉壽堂)

1789년(정조 13) 창건했고 1997년 복원됐다.  봉수당은 화성행궁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건물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고을 수령이 나랏일을 살피는 동헌으로 지었다. 처음 이름은 장남헌(壯南軒)이었으나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계기로 봉수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궁궐에서는 대비나 상왕이 머무는 건물에 목숨 수(壽) 자나 길 장(長) 자를 붙이는 전통이 있어,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며 이름을 바꾼 것이다. 건물은 정면 7칸으로 일반 동헌과 마찬가지로 대청과 방을 둔 구조이나, 마당 한가운데에는 왕이 지나는 길인 어로를 두었고 건물 앞에는 넓은 기단인 월대(月臺: 궁궐의 정전, 묘단, 향교 등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를 갖추었다.

어로와 월대는 일반 동헌에는 없고 임금이 머무는 공간에만 설치하는 시설이다. 1795년 윤 2월 13일,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가 열리던 날 봉수당 월대 앞에 넓은 무대를 설치하고 궁중연희가 펼쳐졌다. 당시 행사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 삼도(三道): 중양문을 지나 봉수당으로 들어가는 길은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는데 넓고 약간 높은 가운데 길은 왕이 다니는 길을 의미하는 어도(御道)이고 양 옆의 길은 신하들이 다니는 길로 오른쪽은 문관(文官), 왼쪽은 무관(武官)이 통행하였다.

궁궐에서 어도(御道)는 국왕 이외에는 함부로 길을 걸을 수가 없었다.

봉수당은 임금 행차시 정전(正殿: 임금이 조회를 하며 정사를 처리하는 장소)으로 쓰인 건물로 중심 4칸을 왕권을 상징하는 편전공간으로 연출하였다. 을묘원행시 이곳은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이 열린 공간으로 이때 정조는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의미의 '봉수당'이라는 당호(堂號)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면서부터 이 건물이 '봉수당'이라 불리게 되었다.

 

 일월오봉도( 日月五峰圖)는 병풍으로 제작되어 역대 조선 왕조의 어좌(임금이 앉는 의자) 뒤에 놓이던 것으로  해와 달(日月), 그리고 다섯 봉우리(五峰)를 표현한 그림이다. 다섯 봉우리는 오악인 삼각산(중앙), 금강산(동쪽), 묘향산(서쪽), 지리산(남쪽), 백두산(북쪽)을 의미한다고 알려졌다. 해는 왕, 달은 왕비를 의미한다. 또한 그림을 구성하는 해, 달, 산, 물, 소나무는 전부 십장생(十長生:  구름불로초거북사슴)에 포함된다. 

정조대왕의 처소

정조대왕이 화성행궁 행차시 신하를 접견하고 쉬던 장소를 연출한 공간이다. 원래는 유여택(維與宅)이 신하를 접견하고 쉬던 장소였으나 관람의 편의를 위해 이곳 봉수당에 연출하였다. 

관람 포인트: 특히 주부자시의도(朱夫子詩意圖)병풍은 당대의 최고 화원 단원 김홍도가 정조시대 정조를 위해 주자의 시를 그림으로 그려 진상한 것으로 정조는 이를 극찬하여 항상 곁에 두고 보았다고 한다.

1795년 을묘원해이 진찬연 장면을 부분 연출한 공간으로 정조대왕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예를 드리고 있고, 여관(女官)들은 왕과 혜경궁 홍씨를 보좌하고 있다. 이날 봉수당 앞마당에서 진찬연이 열렸을 때 혜경궁 홍씨에게 12기의 소별미와 70가지의 음식 그리고 42개의 상화가 바쳐졌다.

 경룡관(景龍館)

1794년(정조18)창건하였고, 1997년에 복원되었다.

경룡관은 장락당으로 들어가는 대문 상부에 지은 다락집이다. 당나라 태종 때 열여덟 명의 학사들이 임금의 시에 화답한 것을 본떠서 정조가 직접 이름을 지었다. 경룡관은 당 태종의 궁전 이름이기도 하다.

아래층 대문 이름은 지락문(至樂門)이다. 이는 즐거움에 이른다는 뜻으로 장락당으로 들어가는 것이 즐겁다는 의미이다.

문의 규모는 작으나 네모난 돌기둥 네 개를 우뚝 세워 위엄을 높였다.

장락당(長樂堂)

1794년(정조18)에 창건했고 1997년 복원 됐다. 

장락당은 조선 정조 19년(1795)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행궁에서 열면서 혜경궁 홍씨가 머물 처소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정조는 중국 한나라의 고조가 어머니를 위해 장락궁을 지은 것을 본받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장락당을 짓고 현판의 글씨를 써서 내렸다. 장락당과 봉수당은 연결되어 있어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다.

장락당은 임금이 화성에 내려오면 머무는 처소로도 사용되었다. 건물은 전체 13칸 규모이며, 삼면에 툇간(집채의 안둘레간 밖에 따로 기둥을 세워 만든 칸살)을 두어 통행에 편하도록 했다.

온돌방은 매 칸마다 겹겹이 문을 달아 아늑하게 만들었고, 문을 모두 열어젖히면 실내가 트이도록 했다. 정조는 장락당과 복내당 사이의 담장에 다복문(多福門과) 장복문(長福門)이라는 두 개의 문을 내었는데, 이를 통해 어머니의 복을 기원하는 정조의 효심을 확인할 수 있다.

다복문(多福門)과 장복문(長福門)

침소에 들기 전 혜경궁 홍씨

장락당이 지어진 다음해 1795년(정조19) 을묘원행 때 혜경궁 홍씨가 실제로 이곳에서 머물렀다. 침소가 차려진 혜경궁 홍씨 방을 연출한 공간이다.

봉수당과 오른쪽 장락당 뒷편으로 사진상 오른쪽 잘린 부분이 긴 행각이다. 

봉수당과 장락당 뒤편의 행각에 위치한 공간으로 환관이 서책을 보고 있는 장면과 환간이 채비를 서두르고 있는 장면을 연출해 놨다.

가어문(嘉魚門)을 지나 왼쪽으로 들어가면

유복문(維福門)이 나오고 이곳을 들어가면 복내당(福內堂)이다.

복내당(福內堂)

1789년(정조 13)창건 됐고 1997년에 복원되었다.

복내당은 수원읍 고을 수령과 가족이 거처하는 건물이다. 조선 정조 18년(1794) 화성행궁에 장락당을 만들기 전까지는 왕의 숙소로도 쓰였다. 정조가 건물의 이름을 직접 짓고 현판의 글씨를 써서 내렸는데, 복내(福內)란 ‘모든 일이 밖에서 제대로 이루어지면 복이 안에서 생겨난다’는 뜻이다. 정조가 쓴 현판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복내당은 처음에는 역ㄱ자 모양의 작은 건물이었으나 1794년에 북쪽으로 온돌방 4칸 반을 추가하면서 ㄷ자 모양으로 확장되었다. 서쪽으로 서별당이 들어서고, 동남쪽으로도 행각이 늘어나서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20세기 초 경기도립병원이 들어서면서 철거되어 화성행궁을 복원할 때 다시 지었다.

복내당의 부엌

복내당은 1790년(정조14) 수원부 신읍치소의 내아(內衙)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된 건물이다. 이곳은 복내당에 딸린 부엌으로 당시의 부엌 살림들이 연출되어 있어 수원부 유수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임금의 수라상

임금에게 올리는 밥을 높여 '수라'라고 한다.

수라상은 아침 저녁 하루에 두 번 올리는데, 기본 음식 외에 12가지 찬품이 준비된다. 수라 중간에는 간편한 죽과 미음, 다과를 올린다.

 

드라마 <대장금>속 수라간(水刺間)

화성행궁은 2004년 종영한 드라마 <대장금>의 활영지로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드라마 속 수라간(水刺間)의  모습을 재현했다. 수라간은 임금의 수라와 잔치음식을 준비하던 궁중 부엌으로 소주방(燒廚房)이라고도 불린다.

▽ 건물과 건물 사이의 담과 통로 역할을 하는 각종 문은 미로와 같아서 어디가 어딘지 방향 감각을 잃어 정확한 위치 파악이 안 되기도 한다. 구여문(九如門)을 지나고...

▽ 경화문(慶華門)을 잠시 나와

▽ 행궁 밖을 나오니 외곽으로 돌아 볼 수 있는 코스도 있다.

유여문(維與門) 안으로 들어가니...

아름다운 건물인 유여택(維與宅)이 자리하고 있다. 

유여택은 수원읍을 옮긴 이듬해인 조선 정조 14년(1470)에 지은 건물로, 화성 축성을 시작하던 1794년 가을에 중축되었다. 처음 건물은 은약헌(隱若軒)으로 부르다가 중축 후 이름을 바꾸었다. 유어택이란 「시경」에서 주나라의 기산(岐山)을 가리켜 '하늘이 산을 만들고 주시어 거처하게 하였다(此維與宅)'라는 고사를 인용해서 지은 집이다. 정조는 유어택에서 신하들의 보고를 받고 과거 시험에 합격한 무사들에게 상을 내리기도 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한 뒤에는 화령전이 완성되기 전까지 현륭원 재실과 창덕궁 주합루에 있던 정조의 초상화를 모시는 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 처음 지은 은약헌의 북쪽 1칸은 공신루(拱樓)라는 누마루였는데 증축허면서 실내에 온돌을 놓고 창호를 달았다. 현재 창호는 복원되지 않았다.

장남헌(壯南軒)

봉수당 이전에는 장남헌이라고 불리웠다는데 한 건물에 여러 명칭이 붙다보니 헷갈리기도 한다.

공신루(拱宸樓)

유여택 앞 마당을 나와 외정리소(外整理所)로 가보기로 한다.

빈희문(賓曦門)을 통과하면 외정리소(外整理所) 건물이다.

외정리소(外整理所)

1796년(정조20) 창건,  2000년에 복원됐다. 외정리소는 화성에서 거행되는 국왕의 행차나 행사에 드는 모든 비용 문제를 총괄하는 곳이다.

조선 정조 19년(1795)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에서 치를 때 행사준비를 담당하기 위해 임시기관으로 만들었다. 화성 성역이 끝난 후에는 행사준비뿐 아니라 화성행궁의 수리, 군사들의 식량과 말 먹이까지 관장하였다.

1796년에 유여택 동쪽의 빈희문 밖에 건물을 짓고, 대문에 외정리아문(外整理衙門)이란 현판을 걸었다. 마루로 된 대청 6칸을 중심으로 주위에 행랑과 창고를 두었다.

문이 열린 곳을 들여다 보니..

정리사가 행사의 준비를 위해 행사 기물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장면을 연출한 공간이었다.

외정리소 뒷편의 기층헌((起層軒)에는 각종 악기가 보관되어 있었는데 고구려시대에 실제로 사용되었던 악기인 하아프 종류인 수공후(竪箜篌), 놋 접시 모양의 나(鑼) 10매를 매달아서 작은 망치로 하나하나 때려서 소리를 내는 운라(雲羅), 철판 16개를 편종과 같은 순위에 따라 벌여 놓은 악기인 방향(方響), 타악기인 진고(晋鼓), 특종(特鐘), 편종(編鐘), 특경(特磬) 등이 전시되어 있다.

봉수당에서 건장문(建章門)을 나와...

우화관(于華館) 문을 들어선다.

우화관(于華館)

우화관은 화성유수부의 객사다. 객사는 지방수령이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국왕에 대한 의례를 행하는 곳이면서 관아를 방문하는 관리나 사신들이 머물던 곳이다.

이를 위해 객사는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는 정청(正廳)을 가운데 두고 온돌방과 마루로 구성된 건물을 좌우에 날개처럼 붙인 모습이 일반적이다. 우화관도 객사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우화관의 정청은 바닥에 벽돌을 깔아 특별히 벽대청(甓大廳)이라 불렀다.

객사의 전패가 국왕을 상징하기 때문에 화성행궁 전체가 동향으로 배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화관은 남향으로 건립되었다. 우화관은 건립 초기 팔달관(八達館)으로 불리었으나 1793년 수원부가 화성유수부로 승격된 이후 정조의 명에 따라 개명되었다.

우화관 이름에는 화(華)지역을 살피러 다니던 요(堯)임금 시절처럼 태평시대가 되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다.

행궁과는 별개로 행궁 울타리 밖 도로가에 거대한 양버즘나무(플라타너스)가 눈길을 끌어 담아 봤다. 

 낙남헌(落南軒)

1794년(정조18)에 창건, 화성행궁에서 공식 행사나 연회를 열 때 사용하는 건물이다.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부하들 덕분에 나라를 세울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 낙양(落陽)의 남궁(南宮)에서 연회를 베풀었다는 이야기를 본떠서 이름을 지었다. 정조는 1795년 을묘원행 당시 낙남헌에서 수원의 백성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무과 시험을 치르고 상을 내리는 등 다양한 행사를 열었다. 

낙남헌 건물은 벽이 없는 개방된 구조로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다. 연회를 베푸는 건물답게 건물 앞에는 넓은 월대(궁궐의 정전, 묘단, 향교 등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를 두어 격식을 높였다. 월대로 오르는 계단 양 옆에는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낙남헌은 궁궐 전각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건물로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수원군청으로 사용되었고, 신풍국민학교 교무실로도 사용되었다. 

노래당(老來堂)

낙남헌에 잇대어서 지은 화성행궁의 별당이다. 조선 정조 18년(1794)에 행궁을 증축하며 낙남헌과 함께 지었다. 정조는 화성에서 노년을 보내기 위해 '늙음이 찾아온다' 라는 뜻을 지닌 노래당을 짓고, 그 뜻을 종종 신하들에게 말했다. 노래당은 아들의 나이가 15세가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화성에 내려와 지내려 했던 정조의 뜻이 담긴 건축물이다. 출입문은 길이 젊음을 보존한다는 의미로 난로문(難老門)이라 이름 지었다. 노래당은 건물의 원형이 잘 남아 있다. 

화령전(華寧殿)으로 발걸음을 옮겨 봤다.

사적 제115호인 화령전(華寧殿)은 1801년(순조 원년) 정조대왕의 뜻을 받들어 화성행궁 옆에 세운 건물로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영전(影殿)이다. 영전은 보통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위를 모신 사당과는 구별되는 건물로, 선왕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살아있을 때와 같이 추모하던 곳이다. 화성에서 ‘화’자와 『시경』의 ‘돌아가 부모에게 문안하리라[歸寧父母]’라는 구절에서 ‘령’자를 따서 이름 붙였다. 화령전은 정조대왕의 뜻을 받들어 검소하면서도 품격 있게 만든 조선시대의 대표적 영전이다. [위키백과]

문을 들어서면 운한각이 나오고...

정전(正殿) 운한각(雲漢閣)

운한각은 정조의 어진(임금의 초상화)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다. 중앙에는 정조 어진을 모신 합자(閤子)를 두고, 좌우에 있는 익실에는 정조가 편찬한 책과 제사에 쓰는 물품을 보관했다. 보통 어진을 모시는 공간은 화려하게 치장하지만 검소한 생활을 강조한 정조의 뜻을 받들어 소박하게 만들고, 학문을 좋아하던 왕을 기리기 위해 익실에 서책을 봉안한 것이다. 이런 사례는 다른 영전에서는 보기 어렵다. 

합자와 익실 바닥에는 온돌을 설치하여 5일마다 불을 넣어 습기를 제거했다. 고종 7년(1872)에 운한각 바닥을 마루로 개조하였지만 아궁이 흔적이 남아 있다. 순조는 1840년에 처음 화령전에 와서 작헌례(임금이 몸소 왕릉, 영전, 종묘, 문묘 등에 참배하고 잔을 올리던 제례)를 올렸다. 이때 건물 이름을 운한각이라 짓고 현판의 글씨를 직접 써서 내렸다. 운한은 많은 서적을 탐구한 학자를 지칭하는 '운한소회(雲漢昭回)'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정조를 상징하는 말로도 종종 쓰였다. 

현재 운한각에 봉안되어 있는 어진은 2004년에 다시 그린 표준영정이다. 원래 모셔져 있던 정조 어진은 1908년에 서울로 옮겨졌으나 1954년 부산 피난처에서 소실되고 말았다.

 

이외에도 출금(出禁)이나 시간관계상 관람하지 못한 행궁이 있어 아쉽긴 하지만 화성행궁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서 정말 뜻 깊은 시간을 가져봤다. 다시 한번 국가유산청이 설명한 수원화성행궁에 대해 되새겨 보며 마무리 한다.

 

수원화성행궁은 1789년(정조13) 수원읍을 화성시 안녕면 일대에서 팔달산 아래로 옮겨 오면서 관청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왕이 수원에 내려오면 잠시 머무는 행궁으로도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행궁은 남한산성 행궁이나 북한산성 행궁, 온양 온천 행궁 등 여러 곳에 있었지만, 전국의 행궁 가운데 화성행궁은 규모에서나 격식에서 가장 돋보이는 곳이었다.
정조는 1789년 10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옛 수원부 읍치자리로 옮기고, 이듬해 2월부터 1800년 1월까지 모두 13차례 현륭원을 방문하였는데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렀다. 특히 1795년(정조19) 어머니인 헤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행궁에서 치르면서 이름도 고치고 건물도 새롭게 지었다.
화성행궁은 1909년부터 수원 주민들을 위한 병원으로 쓰이면서 건물이 철거되어 낙남헌만 남아 있었다. 화성축성 200주년인 1996년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2003년에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국가유산청 설명]

※ 수원화성 환종주 탐방 이어서 보기: https://openwindow.tistory.com/7154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