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1일(일)
향적산 산행을 13:10분에 마치고 노성산으로 이동, 산행을 다시 시작하기로 한다. 다른 곳도 그렇지만 평생 한번도 들어보지도 못한 산 이름과 지명인데 이렇게 와 보게 된다는 사실만으로 그냥 즐겁다. 향적산 보다는 노성산에 더 마음이 가는 것은 유적지를 살펴 볼 수 있는 곳이기에 더욱 그렇다.
특히 명재고택과 노성산성으로 마지막 가을 끝자락에서 고택의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과 명재 윤증 학자에 대한 인물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됐고 백제와 나당연합군이 혈전을 벌였던 황산벌이 노성산에서 불과 몇 킬로 안되는 지점이라는데 대해 그 당시의 처절했던 전투를 상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 볼 수 있다는 점에 의미가 깊다. 이제 그 역사의 현장으로 달려가 보자.
∥산행 정보∥
♣ 소재지: 들머리-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1(노성궐리사), 정상-충남 논산시 상월면 신충리 산 26
날머리-상월면 신충리 53-2(상월면사무소)
♣ 산행코스: 노상궐리사-옥리봉-애향공원갈림길-옥계봉-금강대도-노성산-헬기장-상월면사무소
♣ 산행거리: 4.2km(출발: 14:00, 도착: 16:00)
∥노성산 개요∥
노성산은 충청남도 논산시에 위치해 있는 산으로서, 계룡산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전체적인 산세는 능선이 남북으로 뻗어있으며 소나무와 활엽수 등이 울창하다.
정상에는 백제 때 축성된 석축산성인 노성산성이 남아있으며 그 주변으로 고목(古木)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노성산성은 사적393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망은 무척 우수하여 동쪽으로 드넓은 논산평야와 계룡산, 향적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노성산이라는 이름은 "노둔할 노(魯), 재 성(城)" 자로서, 산의 서쪽에 있는 노성면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 오전에 논산의 향적산을 오르고 다시 이곳 노성산을 오르기 위해 노성궐리사에 도착한 시간은 14:00로, 4.2km의 거리를 2시간 30분 시간이 주어졌으니 오전 산행을 했다해도 350m 높이의 이런 야산은 식은 죽 먹기일 수 밖에 없다.
산행에 치중하기 보다는 유명한 명재고택이나 노성산성을 둘러보는 것이 오늘 산행의 주요 포인트다. 느긋히 산행하며 보고자 하는 것들을 찬찬히 살펴보기로 한다.
▽ 버스에서 하차하여 왼쪽으로 200여 미터 이동하면 명재고택을 볼 수 있다. 관심이 없는 산우들은 그냥 산으로 향하지만 이곳은 언젠가 진사들의 사진을 보던 중 관심을 갖고 있었던 풍경이었는데 바로 명재고택이었음을 이번에 알고 먼저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논산 명재고택(明齋故宅)은 조선 숙종 때 학자인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의 집이다. 윤증은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 · 유봉(酉峰)이며, 성혼(成渾)의 외증손으로 아버지는 윤선거(尹宣擧)이다. 윤선거는 송시열과친구이자 사돈지간으로 후에 아들 윤증으로 인해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지게되어 논쟁할 때 소론의 영수로 추대 되었다.
명재고택은 완만한 경사지에 있으며 한옥의 규범을 충실히 따르는데, 집 앞에 넓은 마당과 왼쪽에 정사각형 인공 연못이 있다. 현재 대문 역할을 하는 남쪽 중문으로 문간채가 이어지며 전체 구조는 ㅁ자형이다. 안채는 높지 않은 기단 위에 있으며 가운데 마당을 둔 멀경(冂)자 형인데, 내외벽으로 가려진 폐쇄적인 공간이 명재의 절제된 미덕을 반영하는 듯 소박하다. 안채의 동쪽 뒤편에는 사당이 있고, 그 앞에는 사랑채가 있다.
현재의 건물은 수리하여 19세기 건축양식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건축 기법은 18세기 양식이다. 또한 안채와 사랑채의 평면은 대체로 중부지방 양식을 따르면서도 특이하게 남도풍을 가미한 형태이다. 명재고택은 구조가 간결하면서도 견실한 형태를 보이며, 보존 상태도 양호해 조선시대 지방 양반 가옥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안내문 인용]
대부분의 양반집 가옥들은 소슬대문이 있게 마련인데 이곳은 담장도 없어 아무나 바로 사랑채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그 당시에도 열린 공간으로 건축된 모양이다.
▽ 입구 오른쪽에는 이와 같은 초가집이 두채 있고 장독과 함께 고풍스런 분위기를 먼저 느끼게 된다. 뒷쪽 한채는 작은 도서관인 노서서재(魯西書齋)이다.
▽ 가을 끝자락에서 먼저 온 진사가 풍경 담기에 여념이 없다. 많은 장독들이 장관이다.
▽ 명재(明齋) 윤증(尹拯)은 임금이 무려 18번이나 벼슬을 내렸음에도 고사하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을 쏟으며 초야에 묻혀 지냈다고 한다. 이 고택은 평생 초가에서 살아온 스승을 위해 1709년에 아들과 제자들이 60칸짜리 한옥을 지어 준 것인데 명재는 살아생전 발걸음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은 고택에서 4km 떨어진 유봉에 있는 작은 초가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돌아가셔서 명재고택(明齋故宅)의 ‘고’자를 옛‘古’가 아닌 연고‘故’자로 쓰고 있다.
▽ 향나무 사이로 우물이 보이고 고택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300년간 이어온 수많은 장독이 있기 까지는 이 우물물과 함께 했겠다.
▽ 수많은 식솔들을 거느리려면 기본적으로 음식의 맛을 내는 간장, 된장의 엄청난 양이 필요했겠고 그 맛을 잇기 위해서는 전독간장(前독 또는 傳독(항아리) 간장)을 씨간장으로 해서 먹지 않고 뒀다가 다음해 간장을 담글 때 항아리마다 조금씩 나눠 새로 담은 장과 섞어 그 맛을 유지해 온 것이 300년이란 세월이란다.
▽ 이러한 전통 간장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점차 사라져 가는 추세이고 이를 안타깝게 여겨 교동(敎東: 향교 동쪽에 있는 고택)이란 브랜드로 간장을 생산하여 시판한다고도 하는데...
▽ 가을 끝자락에 고목, 고택이 장독과 함께 멋스런 풍경이다.
▽ 은행잎이 바래지 않았다면 낙엽조차도 운치있는 풍경이었을텐데 시기가 좀 늦었다.
▽ 명재고택 왼쪽으로 자리잡은 연못에 비친 소나무 반영도 멋지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우주관)을 담아 네모진 연못을 만들었다.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 라는 사상이며 오른쪽 귀퉁이로 원형의 작은 섬을 만들어 놓은 것도 이와 같은 사상에 기초한 것인 듯 하다. 인공섬을 두개로 만든 '방지쌍도형(方池雙島形)'은 해와 달을 상징한다고 한다.
▽ 명재고택 왼쪽으로 바로 붙어 있는 노성향교의 홍살문...
▽ 노성향교의 명륜당
398년(태조 7)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그 뒤에는 1967년과 1975년에 중수하였다는 기록만이 전한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재(東齋)·서재(西齋)·삼문(三門) 등이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이 향교의 대성전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2월 23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1호 "노성향교"로 변경 지정되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인용]
▽ 산행을 위해 다시 들머리 방향으로 이동, 노성궐리사로 향한다.
노성궐리사(魯城 闕里祠)
공자의 영정을 봉안한 영당으로 1978년 12월 30일 충청남도의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었다.
궐리라는 명칭은 공자가 중국의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 궐리(闕里)에서 태어나 본떠 지은 이름이다. 숙종 13년(1687) 우암 송시열이 궐리사를 세우려고 했으나 2년 뒤 세상을 떠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숙종 42년(1716) 권상하·김만준·이건명 등의 제자가 현 위치에서 서쪽방향으로 있는 노성산 아래에 궐리촌(闕里村:현 위치의 서쪽)에 궐리사를 세우고 이듬해에 공자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정조 15년(1791)에는 송조 5현을 봉안하였고 순조 5년(1805)에 관찰사 박윤수가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지금 있는 영당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이곳 외에 강릉, 제천, 오산에도 궐리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이곳과 오산에만 남아 있다.
▽ 문이 잠겨있어 담 넘어로 본 안쪽 모습...
▽ 궐리사 바로 오른쪽 임도로 향하면서 벌써 가 버린 산우들 뒤를 쫒아 내달리는데 앞쪽 모퉁이 끝나는 지점에서 오른쪽 정자가 있는 곳으로 우틀하여 오솔길로 접어 들게 된다.
나중에 GPS로 족적을 살펴보니 궐리사에서 약 350m 지점에서 오른쪽 등로로 바로 오르는 코스도 있었음을 알게 됐는데 알바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200여 미터를 더 걸은 셈이 됐다.
▽ 임도에서 바라 본 논산시 노성면 일대 풍경
▽ 이곳 정자가 있는 곳에서 오솔길로 접어든다. 선두는 지금쯤 어디에 가 있는지 꼬리를 잡기 위해 속도전을 펼친다.
▽ 옥리봉을 오르는 계단이 나타나고...
▽ 노성산 정상이 얼마 안남은 이정표를 지나...
▽ 정상에 오르기전 앞에 가던 산우들의 꼬리를 잡았다.
▽ 정상을 바로 올라 정상에서 왼쪽으로 노성산성을 둘러볼 수도 있고 오르기 바로 전에 왼쪽으로 산성을 둘러보고 오른쪽으로 하산할 수도 있는데 왼쪽인 시계방향으로 돌아 보는 것이 나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좌틀하기로 한다.
▽ 산비탈 오솔길을 200여 미터를 진행하니 수령이 꽤 되어 보이는 느티나무가 마치 성문지기 모습으로 양쪽으로 버티고 서있는 노성산성이 나타나고 그 가운데 길로 올라서게 된다.
▽ 성 위에 올라서니 빈 가옥 한채가 있는데 고즈넉한 위치에 고목과 함께 정말 평화로운 모습의 풍경이 마음까지 평온해 진다.
▽ 역사와 함께 했을 듯, 세월의 풍파를 헤쳐나간 흔적이 나뭇가지에서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 개축된지 얼마 안되어 보이는 산성모습...
이 산성은 둘레 약 950m 옛 이산현(尼山縣)의 진산인 노산(魯山) 혹은 성산(城山)이라 불리우는 산 위에 있는 테뫼식 산성(산 정상을 둘러 쌓은 성)이다. 백제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자연적인 지세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둘레 약1km를 석축으로 거의 완벽하게 쌓은 성지이다.
동면, 북면, 서면을 할석을 다듬어 네모지게 하여 쌓았고, 봉우리 정상에는 장대지로 추정되는 곳과 동벽으로 약간 내려온 곳에 봉수대로 보이는 곳이 남아 있다. 영조 때의 기록『여지도서』에 의하면 노성산 봉수는 남쪽으로는 은진의 황화산 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으로는 공주 월성산 봉수로 신호를 전달해 준다고 되어 있다.
은진에서 노성을 거쳐 공주로 통하는 중요 길목에 자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내에는 우물지가 4곳이 있고, 건물지로 보이는 여러 개의 유지가 있으며, 동문과 서문이 있었던 곳이 발견되었는데, 최근에는 남문지가 발견되어 주목을 끌었다. 이곳에는 백제시대의 기와편과 토기편 그리고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들이 산재해 있다. 이 성은 동쪽으로 계룡산이 막아서고 남쪽으로는 논산평야가 바라다 보이며 북쪽으로는 공주, 서쪽으로는 부여방면이 한눈에 조망되는 요지로, 연산 황산성과 함께 백제와 신라가 대치했던 방어선에 위치한 산성이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노성산성은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사적 제393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인용]
▽ 뾰족뾰족한 기암이 있어 다가가 보니...
▽ 맨 왼쪽 입석의 돌에 총석사(叢石寺)란 글이 새겨져 있고 그 밑으로 알 수 없는 그림과
글이 쓰여져 있다. 이로 봐서 이곳이 총석사란 절터였음을 암시해 준다.
▽ 그 뒷편이 절인가 확인해 보니 아니고, 왼쪽 3개의 입석에 삼신암(三神岩), 오른쪽에는 칠성암(七星岩)이 새겨져 있어 전체가 7개의 입석임을 말해 주는 것 같다. 모두 신앙과 관련되어 새겨진 글일 것이다.
▽ 다른 한쪽에 금강대도 노성본원이라고 새겨진 커다란 간판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이 원래 절터였을 것이란 생각인데 금강대도 노성본원이라고 했으니 정문에는 금강도덕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1874년 강원도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난 토암 이승여는 고려말 이색의 18세손으로 33세 되던해에 종교적 체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선·후천 교체기(오중시대)에 건곤부모(乾坤父母)인 자신이 개화(開化)함으로써, 타락된 인간의 도덕성을 회복하여 인류를 구원하고, 나아가 우주의 평화를 이룬다는 것" 이었다고 하는데...
금강대도는 창도주가 탄생한 1874년을 개도 원년으로 삼고 있지만, 실질적인 교세확장은 1910년 충남 계룡산에 내려와 포교를 시작하면서 이루어졌고 이어 공주와 논산을 거쳐 현재의 노성산자락의 터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 안내문에는 이곳 삼종대성전(三宗大聖殿)은 금강대도의 신앙대상인 대도덕성사건곤부모(大道德聖師乾坤父母)이신 만법교주(萬法敎主), 동화교주(東華敎主), 통천교주(通天敎主)님을 존영(尊影)으로 모셨다고 되어 있다.
▽ 건물안에 수형(樹形)이 특이하게 생긴 나무가 있어 살펴보니 삼나무이다. 엄청난 거목이어서
인증을 해 봤다.
▽ 이제 나무들은 모든 것을 내려 놓은 계절이다. 은행잎이 수북히 쌓인 뜰이 쓸쓸해 보인다.
인생도 다를 바가 없음이다.
▽ 나무 줄기도 신기하고 얼록달록 무슨 나무 수피인고? 나무잎도 없고 수피만 보고
알아 맞춰야 하는데... 모과나무로 보인다.
▽ 땅에 코를 박고 있는 초롱꽃도 싱싱한게 가을답지 않다.
▽ 아무도 접근하지 않은 것 같은 북쪽편의 성을 살펴보니 이쪽도 일부 개축을 한 것이 보인다.
학창시절 배웠던 황산벌 전투가 생각난다. 나당 연합군과 백제가 마지막 혈전을 펼쳤던 황산벌이 현재 논산의 연산지방이다. 노성산에서 몇 킬로 안되는 곳의 벌판이다.
660년 3월 당의 고종은 소정방을 시켜 13만 대군을 이끌고 사비성(지금의 부여)을 공격했고 신라 무열왕은 그해 5월에 김유신과 품일, 흠춘 등과 함께 정예 5만명을 끌고 황산벌까지 진격하여 의자왕은 결사대 5,000명을 주어 이를 막게 했는데 계백은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비장한 각오로 출전했다.
신라군은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네번을 싸웠으나 패했고 이때 신라 장군인 흠춘의 아들 반군이 적진으로 보내 싸우다 결국 죽게 했다. 그러자 장군 품일 역시 화랑인 아들인 관창을 전투에 내보내 백제의 포로가 되었는데 계백은 어린 소년이기에 죽이지 않고 돌려 보냈지만 관창을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 들게 하여 결국 죽게 했다.
반굴·관창의 용감한 모습에 감격한 신라군은 죽음을 각오하고 진격하여 크게 승리했다. 백제군은 중과부적으로 대패하여 계백이 전사했고 좌평·충상·상영 등 20여 명이 사로잡혔다.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660년에 멸망하였다.
▽ 정상에는 팔각정이 세워져 있고 전망하기 좋은 곳인데 오늘은 날씨 관계로 기대를 하지 않는다.
▽ 언제 또 와 볼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인증을 한번 하고...
노성산(魯城山)은 옛날에는 니산(尼山), 성산(城山)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이조 효종때 송시열의 제자들이 니성산하에 궐리사를 창건하고 공자를 제사하면서 지명이 중국산동성 공자가 탄생한 노나라의 니구산(尼丘山)을 연상하여 니성(尼城)을 노성(魯城)으로 고쳐 산 이름도 노성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 조망이 트이는 곳에서 주변을 살펴보니 미세먼지에 멀리 계룡산이 보이고 맞은 편 오른쪽에 오전에 올랐던 향적산이 눈에 들어온다.
▽ 본격적인 하산길에 접어 들었다. 산우들은 이미 벌써 내려갔고 지인과 둘만 남아 부지런히 산우들 꼬리를 잡기 위해 내달린다. 참나무와 떨어진 낙엽, 오솔길이 그 옛날 전투 상황으로 긴장감이 팽배했던 때와는 전혀 다른 평화로운 풍경이니 참 좋은 세상에 태어난 걸 감사하게 생각할 일이다.
▽ 성을 둘러보기 위해 아까 올라오다가 왼쪽으로 접어든 등로가 보인다. 조금만 내려가면 내려가면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상월면사무소로 가는 길이 되겠다.
▽ 이곳에서 좌틀...
▽ 어느 정도 하산하고 나니 평탄한 오솔길이 나오는데 온통 낙엽이더라...
낙엽 밟는 소리가 바스락바스락, 경쾌하게 들린다. 역시 계절이 지나 겨울이나 봄에 밟는 낙엽 소리와 다른 느낌이다.
▽ 이런 곳에 그냥 앉아만 있어도 힐링이 될 듯 싶다.
▽ 동네의 작은 소류지에 도착, 연꽃의 결실이 줄기에 꺾여 고개를 숙였다. 가을엔 이러한 모습도 감성이 있는 진사들에겐 한 컷 담기에 좋은 소재가 되기도 한다.
▽ 뒤 돌아 본 노성산 정상
▽ 논산시 상월면 신충리 마을에 도착... 면사무소 소재지라서 마을이 크다.
▽ 골목길을 벽화로 예쁘게 단장한 길...
▽ 드디어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상월면사무소 앞 도로에 도착, 오늘 1일 2산의 산행을 마친다. 비록 그리 높지 않은 산 두개를 인증을 했지만 이것저것 볼거리가 있었던 산으로 마치 테마산행을 별도로 한 기분이다. 늘 그렇지만 날씨 관계는 자연 현상이라 인간이 어쩔 수 없는 도리기에 조망이 조금은 아쉬운 것 외에 모두가 좋았다는 평이다. 전국의 산하에 논산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으니 그것으로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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