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27일(금)
올해는 하루, 이틀만 년차를 쓰게 되면 직장인들에게 4~5일 황금연휴를 즐길 수 있는 달이 많은 축복 받은 해다. 10월의 경우 추석연휴와 더불어 무려 열흘간의 휴가를 보낼 수가 있으니 너도 나도 해외여행을 간다고 북적일 것은 뻔하다. 이번 설 명절 연휴에도 17만 인구가 빠져 나갔다니 명절 풍속도 많이 바뀌어 가는 현실인데 대부분의 서민들은 명절은 당연히 윗사람들 찾아뵙고 문안 인사드리고 형제가족들과 집에서 어울리는 일로 해외여행은 꿈도 못 꾸는 일이다.
나의 경우 그나마 고향에 살고 있으니 도로상에서 시간 보내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렇지만 부모, 형제가족들과의 만남도 설날 잠시 뿐,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즐겁게 보내야 할 것인지 염두해 두지 않으면 집안에서 따분하게 보낼 수 밖에 없다.
첫날은 아내와 집안청소에 시장을 같이 보자는 요구에도 고집스럽게 그동안 시간이 없어 가지 못한 남한산을 산행하기로 한다. 일기예보 대로 비 또는 눈이라 도 왔으면 상황이 달라졌을텐데 미세먼지가 끼긴 했지만 맑은 날씨여서 머릿속은 온통 남한산성을 한바퀴 도는 일에 집중되어 있다.
그것은 남한산성에 참담했던 역사의 한페이지가 계절적으로 딱 맞아 떨어지기에 그 당시의 상황을 그려보며 둘러 보고자 하니 흥미롭기도 하거니와 다소 진지한 마음까지 들어 운전대를 잡고 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산행정보∥
♣ 행정구역: 경기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1042(남한산성도립공원 남문주차장)
♣ 산행코스: 남문주차장-남문-수어장대-서문-북문-동장대터-벌봉-남한산(522m)-동장대터-장경사-동문-남장대터-남문-남문주차장(원점회귀)
♣ 거리: 10.5km(출발: 10:50, 도착: 14:50)
∥남한산성 개요∥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 중의 하나로,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쌓은 주장성(晝長城)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인조 2)에 축성(築城)하였다. 인조때부터 순조때에 이르기까지 성내의 시설 확장은 계속 되었다.
석축으로 쌓은 남한산성의 둘레는 약 8㎞이다. 자연석을 써 큰 돌을 아래로, 작은 돌을 위로 쌓았다. 동서남북에 각각 4개의 문과 문루, 8개의 암문(暗門)을 내었으며, 동서남북 4곳에 장대가 있었다. 성 안에는 수어청을 두고 관아와 창고, 행궁을 건립했다. 유사시에 거처할 행궁은 73칸, 하궐 154칸으로 모두 227칸을 이때 지었다. 80개의 우물, 45개의 샘을 만들고 광주읍(현: 광주시)의 행정처[治所]도 산성 안으로 옮겼다.
수어사(守禦使) 이시백(李時白)이 축성 뒤에 처음으로 유사시에 대비할 기동훈련의 실시를 건의하여, 1636년(인조 14)에 1만 2,700명을 동원하여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에 막상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가지 여건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성문을 열어 화의(和議)하고 말았다. 결국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쌓은 성이었으나 제구실을 하지 못한 뼈아픈 역사(役事)였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溫祚王)의 성터였다고도 한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으며, 2014년에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 군생활 시절부터 이곳 남문을 오르내리는 일은 수도 없었고 산성 주변의 야생화 촬영은 말할 것도 없고 트레킹, 행사도 심심치 않게 벌였던 곳이지만 막상 종주는 해 본 일이 없기에 벌봉, 남한산 정상은 어디였는지에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이번에 전국 100대명산에 남한산도 포함된다는 사실로 동기부여가 되어 제대로 산행을 해 보게 된 것이다. 남문은 정조3년 (1779년)개보수할 때 지화문이라 칭하였고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며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 것이라 한다.
우리민족이 반만년의 역사속에 전쟁과 침략을 당한 횟수가 평균 5년만에 한번 꼴인 931회라는데 그 중에 가장 치욕적이고도 굴욕적인 외침을 당한 것은 언제일까? 아마도 선조25년(1592년)부터 선조31년(1598년)동안 치른 7년간의 임진왜란이나 그 후 45년만인 1636년 12월에 (인조14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근대에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35년간 식민통치를 당한 (1910년 8월 29일~1945년 8월 15일)일제강점기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산성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적의 공격력을 약화시켜 항전함과 동시에 민간인의 피난처로 이용되어 왔다. 그러기에 산성을 빼앗아야만 전쟁의 승리로 여겼고 결국 국토를 확장하는 지름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그 나라의 왕을 제거하거나 항복을 받아낸다면 손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으므로 장기놀이에서와 같이 왕을 보호하는 일이 나라를 지탱하는 중요한 요인임은 말할나위가 없다.
그렇게 볼 때 산성으로 피신한지 불과 45일만에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군신관계로 수많은 공물을 바쳐야만 했던 가장 굴욕적인 역사적 사건이 병자호란이란 생각이고 바로 그 현장이 이곳 남한산성인 것이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겪은 임금이다. 전란시 도와준 명나라와 대립되어 있던 누르하치가 통치하는 후금(여진,청나라)을 징벌하고자 구원군을 요청하게 되는데 쇠퇴해가는 명나라에 더 이상 기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들어 줄 수도 없는 처지에서 강홍립이 이끄는 최소한의 군대를 지원했지만 결국 명나라는 패하게 되고 강홍립도 사전 임금의 지시에 항복하겠끔 하는 등 두나라 사이에 어느 편도 들지 않는 중립외교를 펼쳤으나 이를 계기로 친명을 주장하던 서인들의 인조반정으로 이어져 인조가 임금에 오르면서 중립외교는 친명배금으로 되돌아 가게 된다. 결국 훗날 병자호란을 맞게 되는 단초가 된 것이다.
후금의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태종(홍타이지)은 조선의 친명배금정책에 대한 불만과 중국본토 정벌에 조선이 배후를 칠 것을 우려하여 사전 조선을 미리 정복하자는 뜻과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구실로 인조4년(1627년) 1월 3만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됐는데 바로 정묘호란이다.
후금군은 파죽지세로 1월 25일 황주(현재 황해북도 황주군)에 이르자 인조를 비롯한 신하들은 강화도로,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하기에 이른다. 이때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로 인해 후금도 더이상 남하하다가 후방을 공격당할 위험이 있어 조선과 강화의사를 표시했고 조선이 받아들여 화의를 맺게되는데 형제의 맹약 조건등이 있었다.
그 후 1632년에는 형제의 맹에서 군신의 의로 양국관계를 고칠 것과 많은 세폐를 요구하면서 조선은 절화(絶和)의 길로 가게 되었다.
이 후 1936년 후금은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군신지의(君臣之義)관계를 요구하고 세폐규모를 늘리는데 대해 조선 조정에서는 그에 무력으로 응징하자는 주전론자(조경, 김상헌, 유계)소장파와 인조반정을 주도한 공신들(이귀, 최명길, 홍서봉)은 주화론을 내세웠는데 이를 알게된 청나라에서는 주전론자들을 볼모로 보내지 않으면 군대를 일으키겠다는 요구에 응하지 않자 그 해 12월 1일 12만명(청군7만, 몽골3만, 한족2만)의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침공하니 바로 병자호란이다.
청나라 군대는 파죽지세로 1636년 12월 9일에는 압록강을 넘은 뒤 13일에는 평양, 14일에는 개성까지 진격했고 인조는 세자빈 강씨와 원손, 둘째 봉림대군, 셋째 인평대군을 강화로 피난 보내고 인조도 가려했으나 청군이 이미 강화도 가는 길을 차단했다는 보고를 받고 소현세자와 백관을 대동하여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된다.
그때 주변 관리들이 수백명씩 군사들을 몰고 집결해 산성내 병력은 1만 4,000여명에 이르렀다. 인조가 도성에서 빠져 나오기 직전 청군은 이미 양철평(현재 서대문구 녹번동)까지 왔다는 급보를 받고 최명길을 청군에게 보내 강화를 청하면서 시간을 끌게 했다.
이튿날인 15일 인조는 다시 강화도로 가기 위해 남한산성을 나섰는데 눈보라가 몰아치고 산길이 얼어붙어 말에서 내려 걸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결국 남한한성으로 되돌아 오게 된다.
청나라 군대와 조선군은 전면전을 펼치지 않은채 산발적인 싸움만 벌였는데 1637년 1월이 되면서 청태종은 군사를 20만으로 늘려 남한산성 밑 탄천에 포진 시켰다. 당초에 산성내에는 양곡 1만 4,300석과 피,잡곡9,500석, 장 220항아리등 50일간의 양곡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보급로가 차단되어 이마저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를 간파한 청 태종은 서한으로 화친의 뜻을 내비치게 되고 이에 화친은 안되며 싸워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척화파 김상헌과 화친을 맺고 훗날을 도모해야 한다는 주화파인 최명길의 의견이 엇갈린 가운데 청은 인조가 직접 성 밖으로 나와 군신의 예를 갖추고 그 전에 척화신(斥和臣) 두세명을 먼저 내보내라고 압박하는 것에 대해 거부하게 된다.
그러나 싸울 뜻이 없는 군사들은 척화신을 내보내라는 목소리를 높였고 주전론자(主戰論者)인 윤집, 오달제는 스스로 적진에 가기를 청했다. 1월 22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그곳에 피신해 있던 빈궁과 대군등 200명의 포로가 남한산성으로 호송하게 되었는데 결국 청 태종의 요구를 받아 들이게 된다.
청군에게 넘겨진 윤집, 오달제, 홍익한은 심양에 끌려 가서도 청에 항복하기를 거부해 끝내 죽음 맞게 되는데 이 세사람을 일러 삼학사(三學士)라고 한다.
▼ 서문- 남한산성으로 피신한지 45일만인 1월 30일, 인조는 소현세자와 함께 이 서문을 통해 남색옷을 입고 산성 밖으로 나가게 되고 많은 백성들의 통곡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삼전도로 향하게 된다.
삼전도(현재의 송파구 삼전동)는 조선시대에 서울과 남한산성을 이어주던 나루였고 그곳에 9층으로 단을 만들고 앉아 있는 청 태종앞에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 례(禮)를 행하게 되었는데 궤(跪)는 무릎을 꿇는 것이고 고(叩)는 머리를 당에 닿게 한다는 뜻이니 무릎 꿇고 세차례 절하고, 아홉번 조아리는 예인데 절할 때 마다 세번씩 이마를 땅에 찧으며(이마방아) 조아리는 일이니 한나라의 왕이 침공 당한 다른 나라의 왕앞에 항복하고 이러한 예를 행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처절하고 치욕적이며 굴욕적인 일인가! 이러한 일이 실제 내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 벌어졌다는 것이 믿어지 지 않는다.
병자호란의 항복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청나라와 조선은 군신의 의를 맺고, 명의 연호를 버리며 명나라와의 국교를 끊고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책인(誥命冊印)을 청나라에 바칠 것, 인조의 장자와 다른 아들 및 대신들의 자제를 인질로 할 것, 청나라의 정삭(正朔)을 받고, 만수·천추·동지·원단과 그밖의 경조사에 조헌의 예를 행하며 사신을 보내어 봉포하되 이들 의절은 명나라에 하던 것과 같이 할 것,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원군을 보낼 것이며 청군이 돌아가면서 가도를 정벌할 때 조선은 원병과 병선을 보낼 것, 조선인 포로가 만주에서 도망하면 다시 잡아가며 대신 속환(贖還)할 수 있다는 것, 통혼(通婚)으로 화호(和好)를 굳힐 것, 조선은 성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조선 안에 있는 올량합인(兀良哈人)을 쇄환할 것, 조선의 일본과의 무역을 종전대로 하고 일본의 사신을 인도하여 청나라에 내조하게 할 것, 매년 1번씩 청나라에서 정하는 일정한 양의 세폐를 바칠 것 등이다. 그 후 1895년 청.일전쟁으로 청이 패배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어 온 왔는데 이것은 한 국가가 다른 국가의 노예 문서와 다를 바 없다.
청 태종은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삼전도비를 세우게 했는데 굴욕적인 비문을 쓰고자 하는 신하가 없었는데 인조의 간곡한 부탁에 이경석이 글을 짓고 오준이 글씨를 썼다. 오준은 치욕을 참지 못해 자신의 오른손을 돌로 짓이겨 못쓰게 만들고 다시는 글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병자호란은 끝이 났지만 세자빈 강씨와 소현세자, 봉림대군등은 청나라 수도인 심양으로 인질로 잡혀가게 되고 60만 인구가 노예로 잡혀가게 되는데 그 중 50만이 부녀자들이라니 그 당시의 참담함을 엿볼 수가 있다. 그들은 노예로 이곳 저곳에 팔려 나갔고 훗날 속환(몸값을 주고 송환해 옴)으로 고향에 돌아온 후에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를 낳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이란 뜻으로 환향녀인데 사대부 집안 남편들이 정절을 의심하여 이혼을 하거나 재혼을 꺼리는 천대와 멸시를 당하게 되고 환향년, 화냥질이란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 돌아온 여인들이 자살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인조는 백성을 지켜 주지 못한 임금의 부덕이라고 말하면서 이 여인들이 홍제천에 몸과 마음을 씻게 하고, 더 이상 과거를 묻지 말고 모두 받아들이라는 교지를 내렸다.
그리고 몸을 씻는 회절강(回節江)을 전국에 지정하였는데 대동강, 낙동강, 한강, 영산강, 금강, 섬진강등이다. 또한 환향녀들은 돌아올 때 이미 임신한 경우가 많아 거기서 낳은 자식을 호로(胡虜) 즉 오랑케 자식이라 하여 냉대를 하였다.
척화파였던 김상헌은 심양으로 볼모로 가면서 시 한수를 읊었다.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보자 한강수(漢江水)야
고국산천(故國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時節)이 하 수상(殊常)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병자호란을 통한 역사적 교훈은 말할 나위도 없다. 위정자들이 나라를 잘못 다스려 국력이 약하면 늘 당하며 살 수 밖에 없다. 그런 경우를 수도 없이 겪으면서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꽃다운 나이에 억울하게 죽어간 민초들은 얼마나 많을까...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 당시를 생각하면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살고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다시는 그러한 치욕적인 역사를 겪지 않고, 쓰지 않도록 해야되지 않겠는가!
▼ 남한산성은 운치있는 소나무가 많아 트레킹 중에도 눈길이 소나무에 주로 집중되니 힐링이 절로 될 수 밖에 없다.
▼ 연주봉 옹성이다. 옹성이란 성문 밖에 반원형(半圓形)이나 삼각형으로 축성된 작은 성. 월성(月城)이라고도 불린다. 그 안에 군사를 주둔시킬 수 있어 성문을 호위하거나 방어를 강화할 때 쓰였다
▼ 왼쪽이 하남시 항동, 오른쪽이 상사창동이다.
▼ 벌봉이 있는 진행방향의 조망이 좋다.
▼ 북문(전승문)-남한산성 북쪽 해발 365m 지점에 있는 북문으로, 이 문을 통해 세곡을 운반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을 감행했던 문이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全勝門)이라 하였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 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사를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법화골 전투라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인조 2년(1624)에 신축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정조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한 후 전승문(全勝門)이라 이름 붙인 것은 그 때의 패전을 잊지 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 뒤돌아 본 가운데 수어장대와 오른쪽 연주봉
▼ 연주봉으로 부터 뻗어내린 능선
▼ 동장대터로 오르는 등로가 제법 가파르다.
▼ 동장대터에서 바라본 봉암성인데 본성 밖의 외성으로 되어 있다. 이곳 동장대터에서 바로 우측 본성을 따라 가면 장경사로 해서 동문으로 바로 향하기 때문에 벌봉, 남한산 정상을 가기 위해서는 제3암문인 봉암성 암문을 통하여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동문쪽으로 진행해야 한다.
▼ 동장대터에서 내려와 이 암문을 통과해야만 봉암성과 벌봉, 남한산 정상(522m)을 갈 수가 있다.
▼ 우선 벌봉을 가려면 계속 직진하다가 이정표가 나오면 왼쪽으로 가면 되지만 나는 궁금증으로 아래 소나무 부분에서 왼쪽으로 성벽을 따라 계속 진행해 보기로 한다.
외성인 봉암성은 성벽이 많이 훼손된 상태다. 언제가 복구가 될런지 본성조차도 이곳 저곳 손 볼 곳이 많아 예산이 꽤 들 듯 하다.
▼ 저곳은 봉암성 오른쪽 끝자락에서 다시 뻗어 내린 한봉이 있는 곳까지 쌓은 한봉성이다. 저곳 까지는 다음으로 기약한다.
▼ 뒤돌아 본 본성...봉암성을 돌아 본 후에 다시 제3암문을 통과 안으로 들어가서 저 성벽을 따라 동문쪽으로 향할 것이다.
▼ 눈위로 걸은 흔적이 아무도 없다. 다 헐어진 성벽길을 따라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긴다.
▼ 이 성을 쌓기 위해 과거 선조들은 얼마 많은 피땀을 흘렸을까를 잠시 생각해 본다.
▼ 10여분 걸었을까 봉암봉 북쪽 끝자락에 도착했다. 여기서 셀카로 인증샷을 담아 본다.
▼ 암문 위쪽에 벌봉이 자리잡고 있다. 남한산은 암릉이 없으나 벌봉 정상이 암벽이다. 이곳 벌봉이 수어장대보다 높기에 전술적으로 중요한 위치해 있기에 이곳까지 외성을 쌓지 않을 수 없다는 안내문의 설명이다.
▼ 벌봉의 정상 모습
▼ 왼쪽 멀리 예봉산이 조망되고 가운데 검단산으로 부터 고추봉, 용마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길게 늘어섰다.
▼ 남한산은 정상석이 없다. 다만 522m라고 적어 놓은 코팅된 표식이 나무에 걸려 있을 뿐이다. 100대명산에 포함되기에 정보를 통해 알게 되었고 코스대로 와서 제대로 찾게 됐다.
▼ 셀카로 다시한번 인증샷 담아보고...
▼ 아까 외성으로 나왔던 길로 다시 본성으로 들어간다. 산이 험하지 않아 편안한 길이다.
▼ 이제 장경사 사찰과 동문쪽으로 진행...
▼ 남한산 정상을 다시 한번 담아본다.
▼ 계속 이어지는 성벽...지금까지 겨우 남문과 수어장대 주변만 어슬렁 거려 본 나는 엄청난 규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데 이러한 훌륭한 성이 있었음에도 병자호란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굴욕적인 항복했다는 사실에 통탄을 금치 못한다.
▼ 동문(좌익문)-남한산성 남동쪽에 있으며 남문(南門)인 지화문과 함께 사용빈도가 가장 높았던 성문이다. 조선 선조 때와 인조 2년(1624)에 수축(修築)하였으며 정조 3년(1799) 성곽을 개축한 후부터 좌익문(左翼門)이라 불렀다. 성문은 홍예문으로, 높이 4m·폭 3.1m이며 홍예기석 위에 9개의 홍예석을 쌓아 만들었다. 낮은 지대에 있어 성문을 지면에서 높여 계단을 구축하였기 때문에 우마차를 이용한 물자수송이 불가능하였다.
▼ 산 윗쪽 멀리 보이는 사찰이 망월사이다.
▼ 남한산과 멀리 용마산이 살짝 보인다.
▼ 광주시의 검단산
▼ 드디어 남문으로 원점회귀했다. 적당한 거리를 산행이라기 보다는 트레킹에 가까운 걸음이었지만 어느 산성보다도 뼈아픈 역사적 사실이 있었기에 어느 한겨울의 추위속에서 고통을 받았을 수많은 그 시절의 민초인 선조들을 생각해 보며 걸어본 의미있는 산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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