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의 남쪽바다!
섬이라면 동서남북이 바다로 둘러 싸여 어느쪽을 가든 갯벌을 접할 수 있겠지만 교동은 북서쪽 바다가 남북이 분단된 휴전선 지역이라 자유롭게 갯벌을 접할 수 있는 곳은 동남쪽으로 제한되어 있다.
마을마다 조그마한 동산을 배경으로 형성되어 애환을 같이 해 왔듯이 바다 또한 그러했다.
어릴적 땔감이 무척이나 귀한 시절에는 여름철 장마로 육지에서 홍수라도 나면 한강,임진강,예성강에서 떠내려 오는 목재가 엄청났고 집집마다 바다에 나가 갯벌위에 막대기를 양쪽에 꽂아 자기 소유임을 주장했고 서로 다투는 일도 있었다.붉게 물든 거센 파도에 집이 통채로 떠내려 가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무서움도 있었지만 그만큼 호기심도 많은 법. 바다로 나가보면 참으로 다양한 물건들이 갯벌에 떠내려 와 있었다. 말 그대로 백화점을 차려 놓은 듯 했다.
도시에서 애들이 갖고 놀았을 각종 장난감,생활용품,심지어 사과,수박등 과일도 즐비했다.
염분에 상하지 않는 것들은 온전한 상태여서 장난감 하나 없었던 그 곳에서는 도시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큰 불행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60년대 중반 이후에는 남북이 극한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태에서 북한이 주민을 혼란시킬 목적(?)인 대남 심리전용으로 부비츄랩 형식의 장난감 혹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상자에 폭탄을 장착하여 개봉하면 폭발하도록 되어 있어 이를 모르고 만지던 어린이나 어른이 끔찍한 일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또한 지금까지 바다에서 이런 저런 일로 유명을 달리한 사람이 얼마이던가!평생을 원망할 바다이지만 바다는 말이 없다. 넘실대는 파도를 감싸 안는 갯벌은 마을 사람들에게 또 한편으론 포근함과 낭만과 더불어 많은 것을 베풀어 준다.3월말쯤 나문재의 어린싹이 뭉텅이로 갯벌을 비집고 올라오면 호미로 다발 묶음으로 캐고, 잎이 올라오면 뿌리를 뽑아 나물로는 그 진한 향과 맛이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나문재가 가지를 치는 5월 단오쯤되면 특히 포근하고 안개가 갯벌을 뒤덮는 저녁에 게(갈게?)를 잡으러 간다.
긴 나무에 솜방망이 횃불을 만들고 기름통과 바께쓰(양동이)를 들고 갯벌에 나가면 게들은 밝은 횃불에 꼼짝 못하고 모두 잡히고 마는데 잠깐이면 바께쓰에 반은 채웠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나문재 위에서 게들이 한 쪽 집게발로 가지를 물고 거짓말 같이 덜렁 덜렁 그네를 타는 것이다. 여름과 가을이면 갯벌 흙을 온 몸에 묻히고 노는 놀이터요,망둥이,가오리 낚시터요,그물질하면 꽃게,숭어,새우를 필요한 만큼 잡곤했던 넉넉한 바다요,갯벌이었다.
어린아이들에겐 그야말로 자연의 교과서였다.그런 옛날 추억을 더듬기 위해 바닷가에 서 본다. 그러나 이젠 그 추억을 찾을 장소가 없다.
갯벌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공유했던 갯벌은 완전히 사라지고 몇몇 개인 소유의 간척지가 되어 버렸다. 이젠 그 많았던 나문재 보기도 어렵고 그 많던 종류의 게도,갯달팽이도 보기 어렵게 되었다. 남쪽 바다에 겨우 존재했던 추억의 갯벌!
그 속에서 나름대로 유지되었던 생태계는 온데 간데 없다. 흉물수런 돌 부스러기만 나뒹굴고 파도에 터져나간 간척뚝이 자연의 노여움을 전해 줄 뿐...
개발 명목으로 사라지는 자연은 얼마인가.인간의 욕심으로 얼룩지는 자연훼손은 결국 인간에게 피해를 가져온다.
이제 남은 한가닥 희망은 휴전선 북서쪽에 자리잡은 갯벌이다.
친수 공간은 아니지만 갯벌이 보존되고 있는 것에서 그나마 위안을 얻는 것이다.앞으로의 미래에 좋은 자연 환경을 후손들에게 물려 주기 위해서라도 교동이 고향인 우리가 갯벌을 지켜 나갔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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