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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충청남도

[부여] 궁남지 & 정림사지 & 부소산성

2023년 7월 19일(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쩌다 가보지 못한 곳이 있었으니 부여와 공주이다. 집안에 연고는 물론 어떤 연유가 없어 가 볼 기회가 없었던 것도 그렇지만  유독 이 지역만큼은 관광이나 여행도 못해 봤기에  더욱 그렇다. 어린 학창시절 삼국시대 역사를 배우면서 수도 없이 듣고 익힌 지역인데  가보질 못했다니 그런 사실에 새삼 내 자신이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느즈막이나마 이렇게 가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작심하고 평일을 잡아 오래 전에 신청해 놓은 곳인데 하필 장마의 폭우로 인해 취소할까 망설이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기회가 없겠다 싶어 실행에 옮기기로 한다.

아쉬운 것은 공주의 공산성의 일부 구간이 훼손되어 출입이 통제되었다고 하여 못 가게 되었으니 이곳 부여에서만이라도 제대로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 뿐이다.

트레킹 정보

♣ 소재지: 궁남지/ 신동엽문학관/ 정림사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부소산성: 부여읍 쌍북리

♣ 코스: 궁남지주차장-신동엽문학관-정림사지-관북리유적-부소산성매표소-삼충사-영일루-반월루-낙화암-고란사-사자루-충영사-

구드래조각공원주차장

거리: 11 km (시작: 09:018, 종료: 13:15)

▽ 서울 사당역에서 부여 궁남지 주차장에  도착 시간은 2시간 남짓 걸렸다. 지금까지 산행이나 트레킹 중에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인 것 같다. 답사에 주어진 시간은 6.5km 거리에 5시간이니 거리로 본다면 정말 너무 여유로운 시간이다. 그러나 지도 한장 없이 그냥 코스만 알려주고 마감 시간만 통보하는 리딩대장이 성의가 없어 보인다. 사전에 지도를 보고 온 나로서도 현지에 도착하니 긴가민가하게 되고 결국 11km나 걷게 되었다. 물론 제대로 답사를 하면서 걷는 거리라면 6.5km는 택도 없는 거리다. 

 

궁남지는 도상으로 사전에 살펴보니 꽤 넓은 공간으로 코스도 복잡하여 다 돌아 보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이곳에 왔으니 안내판에서 한 컷 담고... 

이곳의 연꽃 축제는 4일간의 짧은 기간이었고 3일전에 이미 끝난 상태로 며칠간 엄청난 폭우로 충청권이 많은 피해를 입은 가운데 오늘만큼은 모처럼 해가 나긴 했지만  평일어서인지 사람들의 발길은 많지가 않다.

  연꽃은 이미 많이 져 버려 씨방이 더 많이 보이고 연꽃보다는 수련이 더 많이 핀 것 같다. 

이곳 연꽃은 시기적으로 7월 초순이 절정이라 보면 틀림 없겠다.  피고지고를 반복하므로 늦둥이는 8월 초순까지도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연꽃 조형물도 눈에 띈다.

가시연꽃은 봉오리가 쌀짝 고개를 내밀고 있어 아직 개화시기가 아닌 것인지, 지고 나서 다른 봉오리들이 올라오는 것인지 모르겠다. 

연꽃 산책로에는 이러한 나무수국이 생뚱맞게 펴 있어 눈길을 끌기도 한다.

 궁남지는 1964년 사적 제135호로 지정된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인공 연못으로서, 일본정원 문화의 원류가 되었다는 기록이「일본서기」에도 전한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백제 무왕35년(634) 궁의 남쪽에 못을 파 20여리 밖에서 물을 끌어다가 채우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方丈仙山)을 상징한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이 연못은 백제 무왕 때 만든 궁의 정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연못의 동쪽 언덕에서 백제 때의 기단석과 초석, 기와조각, 그릇조각 등이 출토되어 근처에 이궁(離宮)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위키백과]

궁남지에는 백제 30대 무왕의 탄생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고려후기의 승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왕의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사비성 남쪽 연못 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가에서 홀로 살다가 용신(龍神)과 정을 통하여 아들을 얻었고, 그 아이가 바로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딸인 선화공주(善花公主)와 결혼한 서동(薯童)이며, 아들이 없던 법왕의 뒤를 이은 무왕이 바로 이 서동이라는 것이다.

연못 안에는 서동의 탄생설화가 전하는 ‘포룡정(抱龍亭)’이라는 정자와 함께 주변의 버드나무와 아름다운 연꽃들로 하여금 방문객들의 발걸음을 머물게 한다.

 신라의 인공호수 월지(안압지)보다 40여년 먼저 만들었으며, 신라 안압지 조경 역시 궁남지로 대표되는 백제식 조경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는데 주변에 식재된 원추리꽃이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궁남지에 비치는 버드나무와 포룡정으로 이어지는 교각의 반영도 그림같다.

갖가지 조형물들의 포토죤이 곳곳에 산재되어 있어 가족, 동료, 연인들의 추억담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궁남지내의 궁남지길에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를 조형물과 함께 잘 표현해 놨다.

백제시대 이궁터로 알려진 궁남지 일대에는 아명(兒名)을 서동(薯童)이라 했던 무왕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사비시대에 왕궁 남쪽 못 가에는 궁궐에서 나와 혼자 사는 여인이 궁남지의 용과 교통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백제 제30대 왕인 무왕 장(璋)이다."

그의 어머니가 용과 교통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그의 아버지는 왕이거나 태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궁궐 밖의 생활이 궁핍하였으므로 생계유지를 위해 그는 마를 캐다 팔았다. 그래서 그의 아명이 서동이 되었던 것이다.

서동의 어머니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그를 정성으로 키웠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효성이 지극한 장부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궁중에서 한 노신이 찾아와 왕의 밀명을 전하였는데 신라이 서라벌에 잠입하여 국정을 탐지하라는 것이었다. 

서동은 기거이 받아들여 마를 파는 상인으로 위장하여 신라에 잠입, 탐지활동을 충실히 수행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와 마주치게 되었다. 이후 두 사람이 만남이 잦아지면서 사랑이 싹텄다.

그러나 서로는 국적과 신분이 달라 맺어질 수 없는 사이임을 알았다. 그러나 헤어질 수 없었던 두 사람은 지혜를 짜내 서동요를 만들어 퍼트리기로 다짐했다.

서동은 서라벌의 아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서 마를 나누어 주며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가서 서동 도련님을 밤이명 몰래 안고 간다" 는 노래였다. 이 노래는 아이들의 입을 통해 온 나라에 퍼져 나갔다. 결국 대궐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오해를 받게 된 선화공주는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미리 알고 있던 서동이 선화공주를 백제로 데려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사랑 이야기이다.

 

전북 금마에도 금마서동공원이 있으니 지자체에서는 이러한 전설을 홍보하여 관광객 유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어 어느 곳이 진짜 서동과 선화공주의 전설 배경인지 헷갈린다. 모두 백제 문화권에 들어가는 곳이기에 그러하리라 본다.

참고:  https://openwindow.tistory.com/7154620

며칠간의 폭우가 지나갔음에도 오색천 터널은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색감도 잘 유지되고 있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바람에 살랑대는 천은 마치 여인이 드러내는 치마폭을 연상시킨다. 

연꽃은 절정기가 지나 더 이상 돌아 볼 의미가 없어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계백장군 동상이 있는 군청로타리의 엄청난 크기의 반송이 눈길을 끄는 가운데 신동엽 시인 문학관으로 이동한다. 시간이 촉박할 것 같아 정림사지로 향하다가 문학관으로 향하게 됐다.  

 지도가 없다보니 트랭글에 의존하긴 했지만 자주 보질 않아 결국 지나치다가 다시 되돌아 문학관으로 가는데 골목에 접어들자 이러한 벽화가 있어 근방에 문학관의 분위기가 읽혀진다.

벽화가 있는 좁은 골목이 정감이 간다.

신동엽 문학관에 도착, 직진하면 문학관이고 오른쪽이 생가이다.

시인 신동엽은 충남 부여군 동남리 태생으로  1944년 부여국민학교 (현 부여초등학교) 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전주사범학교에 진학했으나 중퇴한다. 이후 단국대학교에 입학해 사학을 전공했으며, 1953년에 졸업했다.
1950년 국민방위군에 징집되었고, 1951년 국민방위군이 해체되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배가 고픈 나머지 게를 함부로 먹었다가 디스토마에 감염되었는데, 이는 그의 요절의 원인이 되었다.
1953년 단국대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성북구 돈암동의 자취방에 살다가 돈암동 네거리에서 헌책방을 운영했다. 이때 이화여고 3학년이던 인병선을 만났고 1957년 결혼했다. 결혼한 그 해인 1957년, 인병선은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수학하는 대신 가난한 시인과의 삶을 택하고 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인 부여로 내려갔다.
인병선은 부여에서 양장점을 열어 가정의 생계를 책임졌고, 신동엽은 충남 보령시의 주산농업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1959년 페결핵을 앓기 시작했고, 교편에서 물러난 후 처와 자식들을 다시 서울 돈암동 처가로 돌려보냈다. 자신은 부여에서 요양하며, 이때 글에 집중한다. 그로부터 1년 후 1959년,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처음 등장했다. 그리고 조선일보 1959년 3월 24일자를 통해 당선작 이후로의 첫 작품을 발표하는데, 그게 바로 6.25전쟁 전후기의 빨치산을 애틋하게 노래한 <진달래산천>이다. [위키백과]

건물에 밀착된 조각상이 있는데  분위기에 걸맞지 않게 마치 007 영화의 한 장면 같이 누굴 미행하는 듯한 모습으로 "저기 신동엽이 있다" 라는 제목이 붙어있으니 그쪽이 문학관 입구를 가리킴을 말하는 것 같다.

건물 옆쪽에서 본 시인 신동엽 그림이 커다랗게 그려져있는 문학관으로 관람료는 무료이다.

시간이 없어서 내부를 모두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생애를 소개하고 작품 설명과 의외로 많은 유품과 원고 등 생전에 쓰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부인 인병선씨가 모조리 문학관에 기증했다고 한다.민중의 저항의식을 시로 표현했으며 대표작으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껍데기는 가라> 등이 있다.

껍데기는 가라/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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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신동엽의 생가

시인 신동엽 문학관에서 500m 거리에 있는 부여 정림사지 매표소에 도착, 잠시 둘러보기로 하는데 이정표를 잘못보고 매표소를 지나치는 바람에 반바퀴 돌아 공사중인 울타리가 없는 곳으로 들어가 이곳에서도 0.7km를 더 걷게 됐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삼국시대의 백제와 관련된 역사유적으로 678년 백제사의 후기 185년 도읍지인 웅진, 사비의 유산이다.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 전라북도 익산에 분포되어 있다. 이 유적 지구에는 공주 웅진성 관련 유산인 공주 공산성·송산리 고분군, 부여 사비성 관련 유산인 부여 관북리 유적·부소산성·정림사지·나성, 사비 시대 두 번째 도읍지인 익산시의 왕궁리 유적·미륵사지 등 총 8곳의 유적이 포함되어 있다.

이 유적들은 백제가 중국,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 건축, 불교, 예술, 도시 계획 원리와 같은 문화를 받아들여 백제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구현해 냈음을 보여준다. 백제역사 유적지구는 2015년 7월 열린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세계유산 등재가 확정되었다.[다음백과]

부여정림사지(定林寺址)

부여 정림사지는 사적 제301호로 지정되었으며 백제사찰을 대표하는 중요한 유적 중 하나로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사비시대(538~660)의 중심 사찰터이다. 이 절터는 주요 건물인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을 건축하고 주위에 회랑을 구획한 형태로 주요 건물을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한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의 기단은 기와를 사용하여 축조한 와적기단으로 이 역시 백제의 독특한 건물 축조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고대 일본의 사찰에도 영향을 주었다.

부여정림사지 오층석탑

정림사지에 있는 백제의 5층석탑은 1962.12.20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높이 833㎝이다.

이 석탑은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세워진 귀중한 탑으로, 세련되고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며, 백제석탑이 목탑의 번안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보여주고 있는 백제탑 형식 중 전형적인 석탑이자 석탑의 시조(始祖)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석탑은 각부의 양식수법이 특이하고 본격적인 석탑으로 정착하고 있는 전이적인 규범을 보여주고 있어 한국 석탑의 계보를 정립시키는 데 귀중한 존재가 되고 있다.

다음 장소는 시내도로를 따라 부여 정림사지에서 0.7km 거리에 있는 관북리 유적지로 향한다.

관북리 유적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725번지에 위치한 이 유적은 현재 왕궁지로 알려져 있으며, 국립부여 문화재연구소 남쪽일대 184필지 95,048㎡(28,780평) 중 33필지 2,102㎡는 1983년 9월 충청남도 기념물 전백제왕궁지(傳百濟王宮址)로 지정되어 있다. 1982년부터 이 일대를 중심으로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5차에 걸쳐 발굴조사하여 1983년도에는 방형석축연지(方形石築蓮池)가 발견되었고, 1988년 발굴조사에서는 토기 구연부에 북사(北舍)라는 명문이 발견되었으며, 1992년 조사에서는 현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남쪽 50m 지점에서 백제시대의 도로유적과 배수시설이 드러났다. 삼국시대의 궁궐 중 고구려의 안학궁을 제외하면 아직까지 신라와 백제의 왕궁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백제시대 마지막 도읍이었던 사비도성의 일부 유적이 밝혀진 것은 매우 중요한 학술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대한민국 구석구석]

부소산성매표소에서 오른쪽 시계방향으로 올랐다가 한바퀴 돌고 왼쪽으로 내려 오기로 한다.

부소산성(扶蘇山城)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 소재한 대한민국의 사적 제5호으로 지정되었으며  이 성은 백제의 도읍 사비(泗沘)의 중심을 이룬 산성으로 도성(都城)을 방어하는 핵심 시설이었으며, 백제가 웅진(熊津, 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도읍을 옮긴 서기 538년(성왕 16) 이전에 이미 축조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소산은 부여읍 쌍북리, 구아리, 구료리 일원에 걸쳐있는 해발 106m의 산으로 면적은 960.828㎡(290,650평)이며, 북쪽에는 백마강이 감싸 흐르고 있어 천연적인 지세로 외적방어에 유리하고 남쪽은 완만한 구릉지로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에 산성을 쌓아 백제왕궁과 도성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던 부여의 진산(鎭山)이다.

부소산성은 군창지와 사자루이 산봉우리를 머리띠를 두르듯 쌓은 테뫼식과 골짜기, 능선을 감싸며 쌓은 2,495m의 포곡식 산성이 혼합된 백제의 독특한 복합식 산성이다. 산성의 축조 방법은 성벽 안쪽의 흙을 파서 성안의 호(壕)를 만들고 파낸 흙을 성 안쪽벽에 붙여 쌓았으며 성의 바깥면은 밑바닥을 흙으로 판축(版築)하듯이 단단히 다졌고 아래 부분에는 돌을 밖으로 약간 내물려 쌓았는데 산성 밑바닥의 폭은 약 7m 정도이고 높이는 대략 4~5m 정도이다.

산성내에는 군량미을 보관했던 군창터(軍倉址)와 동·서·남·북 방향에 4개의 문터(門址), 백제의 왕과 귀족들이 해를 맞으며 국정을 계획했던 영일루(迎日樓), 백마강에 잠기는 달을 보며 국정을 정리했던 송월대(送月臺)에 세원 사자루(泗泚樓), 백제시대 군인들이 움막인 수혈병영지(竪穴兵營址), 망루(望樓)로 추정되는 반월루(半月樓), 백제 패망시 수많은 여인들이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낙화암(落花岩), 그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고려대 세운 고란사(皐蘭寺)에는 고란약수와 고란초가 유명하며 성의 남쪽 기슭에는 백제말 삼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삼충사(三忠祠)가 있고 서쪽 구릉에는 백제시대 사찰터인 서복사지(西腹寺址)등 많은 유적이 있어 부소산성이 평상시에는 궁궐의 후원(後苑)으로 이용되었으며, 유사시에는 왕궁과 도성을 방어하는 최후의 성곽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충사(三忠祠)

삼충사는 백제의 충신이었던 성충·홍수·게백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1957년에 건립하였으며 1981년에 다시 지었다. 성충은 백제 의자왕(641~660)때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가 옥중에서 단식으로 죽은 충신이다. 흥수는 나당연합군의 공격(660년)에 맞서 백제의 요충지인 백강, 탄현을 방어하고자한 충신이나 귀족들의 반대로 지키지 못하였다. 계백장군은 5천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논산시 연산면)에서 신라 김유신 장군의 5만 대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백제의 명장이다. 이곳에서는 매년 9~10월 개최되는 백제문화제 때 세 충신에게 올리는 '삼충제'를 지내고 있다.

일영루(迎日樓)

백제시대에 영일대가 있었던 곳으로 계룡산의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라고 전해지는 곳이다. 지금의 건물은 1964년 홍산에 있던 조선시대의 관아문을 옮겨와 세운 것으로 이름을 영일루라고 하였다. 누각을 옮겨 세우기 위해 땅을 고르게 다듬는 공사를 할 때 백제이 와편이 많이 출토되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청마산성이 바라다 보이며, 계룡산의 연천봉(739m)이 아득히 바라다 보인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1호이기도 하다.

▽ 영일루에서 반월루, 낙화암, 고란사 방향으로 가는 길로 숲이 잘 조성되어 있다.

반월루(半月樓)

부소산성의 서남쪽 능선에 있는 누각으로 1971년에 지었다. 당시 부여군수였던 전준기의 노력으로 국고보조금을 지원받아 건립하고 반월루라 하였다. 현대에 지어졌지만 누각 이름인 반월루는 부여의 별칭 가운데 하나인 반월에 연유한 것이다. 부여 팔경 가운데 부소산 모우, 침월은 물론 아래의 구룡평 낙안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여러 루각이 있지만 잡목으로 인해 조망이 전혀되질 않고 이곳에서 시내를 바라보는 조망이 최고이다.

▽ 남쪽 방향의 풍경

남서방향의 풍경으로 부여대교가 보인다.

서쪽 방향의 풍경으로 백마강과 백제교가 보이고 오른쪽 멀리 천덕산(363m), 천보산(330m), 월명산(544m)이 조망된다.

폭우가 엊그제까지 내린 후 오늘은 섭씨 34도나 되는 폭염주의보가 내렸다니 바람도 별로 없는데다 습도가 높아 낮은 산의 숲길을 걷는데도 온 몸은 이미 땀으로 젖었다. 이곳에서 왼쪽 낙화암을 들렀다가 다시 돌아와 고란사로 내려가기로 한다.

백화정(百花亭)

백화정은 낙화암(落花岩) 위에 있는 정자이다.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사비성이 함락될 때 이곳에서 목숨을 버린 궁인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혜주(惠州)에 귀양을 갔을 때 성밖의 호수를 보고 지은 강금수사백화주(江錦水射百花州)라는 시에서 유래한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8호이다.

낙화암에서 바라 본 백마강 북쪽풍경

낙화암(落花岩)은 부소산 북쪽 백마강을 향해 우뚝 서 있는 큰 바위이다. 바위는 50m 정도 높이의 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강물에 이르러 한 번 꺾인 단이 있다. 이 단을 이룬 암벽에 송시령이 '落花岩'이라고 쓴 글씨가 새겨져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가 멸망할 때 궁인들이 화를 피하지 못할 줄 알고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며 부여성 북쪽 모퉁이 큰 바위에 올라 몸을 던져 순절하여 타사암(墮死岩)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훗날 사람들이 궁인을 꽃에 비유하여 이곳을 낙화암으로 불렀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0호로 정해졌다.

▽ 낙화암 바로 아래의 백마강 풍경

일반적으로 금강변 부여읍(扶餘邑) 정동리의 앞 범바위[虎岩]에서부터 부여읍 현북리파진산 모퉁이까지의 약 16㎞ 구간을 백마강이라 한다. 요즘 장마 폭우로 인해 많은 피해가 발생하는 가운데 백마강이 황톳물로 바뀌었다.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신무산(神舞山, 897m)에서 발원하는 금강은 서쪽으로 꺾여 흘러서 공주에 이르러 웅진(熊津) 또는 금강이 되고 유구천(維鳩川)을 합하여 남쪽으로 곡류하면서 부여군에 이르러 고성진(古省津) 또는 백마강이 된다. 금강은 백마강을 지나 논산천(論山川)을 합하고 강경을 거쳐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이루며 황해로 들어간다.

  낙화암위에서 기념 촬영

고란사로 내려 가는 등로는 그동안의 폭우에도 유실되거나 훼손된 곳이 없어서 다행이다.

이곳에서 다시 왼쪽으로 가면 고란사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유람선 선착장으로 가는 길이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10분이면 산악회 버스가 주차된 구드래나루터선착장으로 갈 수가 있다는데 오늘은 운항을 안 한다니 무척이나 아쉽다.

고란사 전경

고란사(皐蘭寺)는 부소산의 북쪽 백마강변에 있는 절이다. 언제 세워졌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백제 아신왕(?~405)때 혜인대사가 세웠다는 설과 백제 사비성이 함락되자 낙화암(타사암)에서 떨어져 목숨을 버린 궁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고려 현종 때 세웠다는 설이 전하는데 자세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조선 시대의 산수도인 이윤영의 「고란사도(皐蘭寺圖,1748)」를 통해 옛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이곳에 고란사가 세워지기 전에는 아름다운 주위 경관을 볼 수 있는 백제 왕의 정자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이다.

고란사 극락보전

이곳 고란사에 들러 깜빡하고 고란초를 살펴 보거나 고란약수를 마셔보는 고란정을 들러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움을 남는다.

  고란사 아래로 보이는 유람선선착장으로 유람선을 탔더라면 낙화암의 절경과 송시열이 쓴 글도 볼 수있었을 텐데 아쉽기만 하다.

  주차장으로 향하면서 부소산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자루를 들러봤지만 북쪽의 백마강만 잡목사이로 살짝 보일 뿐 조망이 없다.

사자루(泗泚樓)는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인 송월대(送月臺)에 있는 누각이다. 조선시대 임천의 관아 정문(개산루​)을 1919년에 이곳으로 옮겨와 사자루라 하였다. 건물 앞면에는 대한제국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이 쓴 '사자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백마강 쪽으로는 김규진이 쓴 '백마장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을 옮겨 세울 때 '정지원'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는 백제시대의 '금동정지원명석가여래삼존입상'(보물제196호)이 발견되어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송월대에 높고 화려한 누각이 있어 政事에 지친 王이 다락에 올라 달을 보내며 휴식을 했다고 한다.

 

 충영사(忠靈祠)

이곳은 나라와 겨례를 위하여 고귀한 생명을 바친 전몰군경(戰歿軍警)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6.25참전, 베트남 참전, 대간첩 작전 등에서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927(2004년 현재)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이 사당은 1960년 민간단체인 부여군 전몰군경 충령각건립기성회에서 성금을 모아 건립했는데 건물이 낡고 헐어 부여군에서 2004년 증·개축했다. [안내문]

▽ 사자루를 지나 매점이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백제 궁녀들의 넋을 위로하고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65년에 세운 궁녀사(宮女祠)를  그냥 지나치고  빈터만 있는 서복사지(西腹寺址)를 지나 매표소를 빠져나오면서 관북리 유적지을 경유, 주차장이 있는 구드래조각공원 쪽으로 향한다. 

너무도 무더운 날씨에 주로 포장된 도로만 걷다 보니 더욱 덥고 다리에 피로가 온다. 어떤 회원은 생각없이 차라리 비가 왔으면 좋았겠다는데 비 피해를 당한 분들을 생각하면 할말이 아니다. 아무튼 비 피해를 본 분들이 정부의 신속한 지원으로 빠른 복구와 정상화가 하루 빨리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 시간이 남아 구드래조각공원을 좀 들러 보려다 더위로 인해 포기하고 마감 시간까지 그늘에서 간식을 먹으며 쉬기로 한다.

많은 조각 작품 중에  힘들게 저 높은 곳을 향하는 애들의 형상이 마치 지금까지 늘 산과 바다를 향한 나의 모습이 생각나서 한 컷 담아 봤다. 오늘은 평생 처음으로 부여일대를 다녀보며 역사 공부를 느즈막히 하게 됐다. 역사속으로 사라져 버린 백제지만 문화가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음을 살펴 보며 많은 생각을 해 본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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