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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및 기타

[안동] 도산서원

2023년 3월 1일(일)

안동의 왕모산을 산행하고 날머리인 단촌마을입구에서 7km 떨어진 도산서원을 버스로 이동하여 탐방하기로 한다. 사실, 왕모산 산행보다 도산서원에 방점을 두고 산행지를 택한 것이니 퇴계선생에 대해 이참에 더 알게 되고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주차장에는 그리 많은 관광객이 있어 보이진 않는 다소 한적한 느낌이 든다.

▽ 관리사무소와  매표소 건물이 근사하게 세워져 있다.

입장료는 어른이 2,000원으로 작년에는 1,500원이었다는데 인상률로만 본다면 꽤 많이 오른 셈이다.

  매표소에서 도산서원까지는 약 400m를  가야한다. 정겹게 쌓은 석축과 향나무로 조경된 깔끔한 도로를 따라 이동하게 되는데 주변 경관이 좋아 가을철이면 단풍과 어우러져 더 보기 좋을 듯 하다.

  도산서원 앞 광장에 들어서자 눈길을 끄는 고령의 향나무

  도산서원(陶山書院) 전경

도산서원은 경북 안동시에 위치해 있으며 조선중기 퇴계 이황 선생이 고향을 돌아온 후 제자를 육성하던 곳이다. 이곳은 1561년(명종 16) 퇴계선생이 직접 건립하여 제자를 육성하던 도산서당과 퇴계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 퇴계선생의 위패 등을 모신 도산서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도산서원의 현판은 1575년 선조에 의해 하사된 한석봉의 친필이며 이후 영남유학의 총 본산이 되었고,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에도 훼손되지 않은 47개의 서원 중 하나였다.

현재 사적 170호, 보물 211호, 보물 210호로 지정되었으며 2019년 7월 6일에는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도산이라는 이름은 '질그릇 도(陶), 뫼 산(山)' 자로서, 옛날 이곳에 도자기를 굽는 가마가 있었다고 하여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조심스럽게 출입문 안으로 들어가 보는데...

밖에서 보기와는 달리 안이 상당히 넓다. 오른쪽 건물이 1561년(명종 16) 퇴계선생이 직접 건립하여 제자를 육성하던 도산서당이다.

도산서당(陶山書堂)

퇴계선생이 낙향 후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지었으며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 유생들의 기숙사 역할을 한 농운정사와 부전교당속시설인 하고직사(下庫直舍)도 함께 지어졌다. 국가지정 보물 제2015호이다.

도산서당은 원래 부엌, 온돌방, 마루로 되어 있었는데, 제자들이 늘어나면서 부엌과 마루를 확장하였으며 확장한 마루 위에는 덧지붕(지붕의 물매를 잡기 위하여 서까래를 덧대어 꾸민 지붕)을 달았다. 

퇴계가 머물던 방의 이름은 완락재인데 '완성하며 즐긴다' 의 의미이다. 제자를 가르쳤던 마루는 암서헌으로 '바위에 깃들어 작은 효험을 바란다' 는 뜻을 포함한다. 두 이름 모두 주자(朱子)의 글에서 따온 것으로, 학문의 즐거움과 겸손한 마을을 담았다.

온돌방의 모습

▽ 도산서원 본관 건물로 들어서는 진도문(進道門) 좌우에는 광명실(光明室) 건물이 있는데...

▽ 광명실(光明室)

1819년(순조 19) 장서고(藏書庫)인 동광명실(東光明室) 건립하였고(왼쪽), 1930년(경오년) 서광명실(西光明室) 증건(增建)하였다. 광명실은 책을 보관하고 열람하던 곳으로, 이름에 포함된 의미는 '수많은 책들이 밝고 환하게 비추어 준다' 이다. 습기로 책이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 2층 누각으로 높게 지었다. 현판의 글씨는 퇴계가 직접 썼다.

도산서원 전교당

도산서원 현판은 1575년 선조가 내려주었으며,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

▽ 전교당

도산서원의 강당으로 1574년에 세웠다. 강당은 유생들이 경학을 공부하는 서원의 중심 건물이다. 전교당은 대청과 서쪽에 한존재(閑存齋)라는 온돌방이 있다. 도산서원의 원장이 머물렀던 한존재의 문을 들어 올리면 대청까지 트인 넓은 공간이 확보된다. 전교당 서쪽 계단 옆에는 높게 만든 돌기둥 위에 반원 모양의 돌을 받쳐 놓았는데, 이것은 밤에 행사할 때 불을 밝히던 정료대(庭爎臺)이다. 전교당 동쪽 뒤편 높은 곳에 사당인 상덕사(尙德祠)가 있다. 

▽ 동재(왼쪽)와 서재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는 도산서원이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기숙사이다. 상급생들이 사용했던 동재의 이름은 '박약재(博約齋)'이고, 서재의 이름은 '홍의재(弘毅齋)이다. 

▽ 안동 도산서원 상덕사 및 삼문

상덕사(尙德祠)는 퇴계와 제자 조목(趙穆)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며, 삼문은 사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상덕사는 1574년에 지었다. 일반적으로 사당 건물은 간결하게 맞배지붕(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이 용마루까지 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지붕)으로 짓는데 도산서원의 사당은 팔작지붕(사다리꼴의 맞배지붕에 측면에 지붕을 달아낸 형식의 지붕을 지칭하며 높은 곳에서 지붕을 내려다 봤을 때 그 모습이 팔(八)자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하여 팔작이라 한다.)을 얹었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를 받드는데 3일 전부터 준비하여 당일 오전 11시에 지낸다. 사당에는 퇴계의 제자인 조목이 종향되어 있다.

삼문은 상덕사와 같은 때에 지어졌다. 가운데 문은 혼이 다니는 문이라 하여 사람이 쓰지 않고, 사람들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고 나온다.

▽ 장판각

도산서원에서 만든 책의 목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퇴계의 문집, 언행록, 글씨 등을 생긴 목판을 보관하였다. 목판을 보존하고 연구하기 위해 2003년 목판 전부를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옮겼다.

  전사청(典祀廳)

전사청은 사당인 상덕사에서 향사를 받들 때 제주와 제수(제사음식)를 보관하던 곳이다. 동쪽(왼쪽)건물은 제수를 보관하고, 서쪽건물은 제주를 보관하던 주고(酒庫)이다.

 

  고직사(庫直舍)

도산서원을 관리하고 식사를 준비하던 사람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전교당과 도산서당 왼쪽에 각가 상고직사와 하고직사가 있다.

상고직사는 도산서원 영역의 관리인들이 거처하던 곳이고, 하고직사는 도산서당의 관리인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상고직사는 뒤편의 전사청과 아쪽의 하고직사와 바로 연결되어 관리인들이 편하게 사용하도록 하였다.

  왼쪽이 유생들이 사용하던 기숙사인 농운정사이고 오른쪽 건물이 퇴계선생의 유품과 저서 등을 전시해 놓은 옥진각이다.

  옥진각(玉振閣) 

1970년에 완공되었으며 퇴계선생의 유물 전시관으로 옥진은 '集大成 金聲玉振' 을 줄인 말로 '집대성 했다는 것은 금소리에 옥소리를 떨친 것이다' 라는 의미라고 한다.

고직사 방향으로 올려다 본 모습, 오른쪽 건물이 농운정사이다.

▽ 농운정사( 롱(隴)雲精舍) 

농운정사는 퇴계의 제자들이 머물면서 공부하던 기숙사이다. 건물은 ‘工’자 모양으로 하였는데 학생들의 공부가 성취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퇴계가 설계하였다. 농운정사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동쪽 마루는 시습재(時習齋)로 공부를 하는 곳이고, 서쪽 마루는 관란헌(觀欄軒)으로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었다. 마루 뒤쪽에는 지숙료(止宿寮)가 있는데 서당에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사진자료:문화재청)

  역락서재(亦樂書齋)

역락서재는 농운정사와 같이 도산서당의 기숙사이다. 1561년 정사성(鄭士誠)이 퇴계의 제자가 될 때 정사성의 아버지 정두(鄭枓)가 제자들과 협력하여 지었다. 현판의 글씨는 퇴계가 직접 썼다.

  도산서원 앞마당에는 이와 같은 고령의 왕버들 두 그루가 있어서 시선을 끌게 한다.

이 왕버들은  퇴계 선생이 도산서당을 지을 시절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안동댐 조성 시 수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도산서원 전면부 마당을 5m 가까이 성토하는 과정에서 지하고 대부분이 땅 속에 묻혔다. 퇴계 선생은 「도산잡영」에서 시냇가의 왕버들을 바라보며 풍류 넘치는 버드나무와 봄의 아름다운 모습을 노래하였다.[안내문]

  도산서원 앞 낙동강변에 마치 섬위에 외로이 세워진 한 채의 건물이 보인다. 시사단(試士壇)으로 안동댐이 생기기 전에는 강변의 우거진 소나무에 비각이 세워져 있었는데 1975년에 그자리에 10m를 높혀 원형 그대로 세웠다고 한다. 

시사단(試士壇)은 조선시대 지방별과(地方別科)를 보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각(碑閣)이다. 정조대왕께서 퇴계 이황선생의 유덕(遺德)을 추모하여 그 16년(1792)에 간원 이만수(李晩秀)를 도산서원에 보내어 임금의 제문(祭文)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 다음날 이곳 송림(松林)에서 어제(御題)로 과거를 보았는데, 응시자는 7천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비문은 당시 영의정인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지었다. 안동댐 수몰로 송림은 없어지고 단(壇)만이 현 위치에서 지상 10m 높이로 축대를 쌓고 그 위헤 과거를 보았던 자리를 표(標)해두고 있다.[안내문]

  이곳이 안동호의 안동댐 상류지점이다. 왼쪽 낙동강 물줄기가 저 아래로 흘러 안동호에 담수가 되는데 가물어서 강변이 다 드러난 상태이다.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라고 해서 도산서원 양편 산기슭에는 절벽이 있는데, 퇴계가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몸과 마음을 수양하기 위해 산책하던 곳이다. 퇴계는 서쪽 절벽을 천광운영대, 동쪽 절벽을 천연대(天淵臺)라고 불렀다.

천광운영대는 주자(朱子)가 지은 관서유감(觀書有感)이란 시에 나오는 '하늘과 빛과 구름의 그림자가 함께 감도는구나[天光雲影共排徊]' 라는 구절에서 이름을 지었다. 천연대는 시경(詩經)에 나오는 '솔개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노네[[鳶飛戾天 漁躍于淵]'라는 구절에서 하늘 천(天)과 연못 연(淵)을 다서 지었다. 두 이름에는 주변의 절경과 퇴계가 말년에 이곳에서 자연의 이치를 벗 삼아 학문을 성취하려던 뜻을 담고 있다. [안내문]

우리나라 천원짜리 지폐에 도산서당과 천광운영대가 그림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난생 처음 방문해 보는 도산서원을 방문하여 퇴계선생에 대해 살펴 볼 수 있는 기회여서 의미 있는 시간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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