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8일(토)
모처럼 고향방문을 했다. 급격히 내려가는 영하의 추위에 비어있는 시골집 수도가 동파될 것을 염려하여 보온을 하기 위해서인데 시간이 남으니 고향의 화개산을 오르는 것 보다 평소 강화읍의 남산을 올라보자 했던 결심을 이참에 실천하기 위해 동,서,남,북의 4대문을 트레킹하면서 유적지도 함께 돌아보게 됐다.
교동도로 향하는 48번 국도가 강화읍 외곽으로 확장, 지난 11월 29일 10시에 개통이 되어 휴일에 정체되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게 됐다. 강화대교를 건너 600m 정도에 이르면 오른쪽으로 접어드는 고속국도를 타면 된다.
강화는 흔히 지붕없는 박물관이라 한다. 그만큼 역사적으로 많은 유물과 유적지가 있다는 얘기다. 비록 고향이 조금은 떨어진 교동도이지만 머리가 히끗해 질 때까지 남산, 북산을 한번도 오르지 않았다는 것은 애향심이 부족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뒤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고향 곳곳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선조들의 숭고한 정신을 받든다면 후손으로서의 자그마한 도리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트레킹 코스는 나무가 거의 없다. 햇살 뜨거운 계절이 아닌 10월~4월까지가 제일 좋은 시기가 아닌가 생각하면서 가볍게 운동삼아 역사를 더듬는 기회가 된다면 일석이조의 뜻 깊은 한나절이 될 듯 싶다.
∥트레킹 정보∥
♣ 행정구역: 강화읍 신문리 4-4(남문), 남산정상-인천 강화군 강화읍 남산리 산 47-12
♣ 코스: 남문-남장대-연무당옛터-남문-강화향교-북문-북장대터-고려궁지-용흥궁-강화성당-원점회귀
♣ 거리: 약7.7km(3시간 소요)
▼ 동문(망한루(望漢樓))
교동에서 확장된 48번 국도를 강화방향으로 나오다가 강화읍 이정표를 보고 읍내로 들어서다 보니 강화중학교 부근의 동문이 길옆에 자리잡고 있다. 다른 곳도 그렇지만 이곳에 동문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강화산성은 고려가 몽고의 침입에 맞서 고종 19년(1232)에 수도를 강화로 옮기면서 축조되기 시작되었다. 고려시대 당시 강화에는 내성, 중성, 외성이 있었는데 내성은 조선시대에 개축되어 현재의 강화산성이 되었다. 병자호란 때 일부가 파괴되었으나 숙종 36년(1710)에 강화 유수 박권이 다시 석성(石城)으로 고쳐 쌓아 현재와 같은 규모가 되었다. 산성의 둘레는 7,122m이며 성벽의 높이는 약 3m, 너비는 4m 내외이다. 성문은 동서남북에 4개소가 있고 암문(暗門)이 4개소, 수문
(水門)이 2개소 있었다. 성문의 문루는 남쪽의 안파루(晏波樓), 서쪽에 첨화루(瞻華樓), 북쪽에 진송루(鎭松樓), 동쪽에 망한루(望漢樓)가 있었다. 첨화루는 1711년 강화유수 민진원이 건립하였고 안파루는 쓰러진 것을 1973년에 다시 복원하였으며 진송루는 원래 문루가 없었던 것을 1783년 김노진이 건립하였다. 망한루는 각종 문헌사료와 발굴조사 결과에 기초하여 2003년에 복원하였다. [안내문]
▼ 동문의 내외곽 모습
▼ 남문(안파루(晏派樓))의 내외곽 모습
1711년(숙종 37년) 유수 민진원이 건립하였다. 이 문의 편액은 이계 홍양호가 썼는데 1955년 5월 호우로 붕괴되었던 것을 1975년 문루와 성곽 일부를 복원하였고 1976년 강화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현재와 같이 정비하였다. 1876년 운요호 사건이후 진행된 조일 회담 때는 일본 대표단과 군대가 입성하기도 했던 아쉬운 근대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현판은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의 글씨이다. 겹처마 팔작지붕의 누각으로, 바깥쪽에는 '강도남문(江都南門)'이라고 쓴 현판이, 안쪽에는 안파루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 남문인 이곳으로 부터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된다.
강화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점면 장정리, 화도면 사기리와 동막리 등지에서 구석기 유물이 수습되었고, 군 내의 여러 곳에서 신석기 유물이 채집된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하점면 부근리와 신삼리 등지에 분포해 있는 고인돌,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기 위해 쌓았다는 마니산의 참성단(塹城壇), 길상면에 단군이 세 아들에게 명해 쌓게 했다고 전하는 삼랑성(三郎城)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이후에도 사람들이 많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 고구려는 강화에 혈구군을 설치했으나 757년(경덕왕 16) 신라가 이곳 강화를 점령해 해구군이라 개칭했고, 790년(원성왕 6)혈구진이라는 군진을 설치하였다.
▶ 940년(태조 23)강화로 개칭하고 현을 두었는데, 이 때 비로소 강화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되었다. 몽고의 제2차 침입 직전인 1232년(고종 19) 고려는 도읍을 이곳으로 옮겨 강도(江都)라 칭하고 몽고에 대한 항전을 계속하다가 1270년(원종 11)개경으로 환도하였다.
▶ 고려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금속활자의 주조, 팔만대장경의 조판, 상감청자의 제작 등이 이루어진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개경환도가 이루어지자 이에 반대하던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켜 고려 조정과 몽고에 항쟁하다가 진도로 남하하였다. 이 때 삼별초는 1,000여 척의 배에 각종 재물과 인질로 삼은 고관의 가족들을 싣고 진도로 남하해 항쟁을 계속하였다.
▶고려 말기에는 왜구가 자주 침입해 피해가 컸으며, 충렬왕 때에는 잠시 인주(仁州 : 현재의 인천)에 병합되었다가 1377년(우왕 3) 강화부로 승격되었다.
1413년(태종 13)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618년(광해군 10) 부윤을 두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가 일시 강화로 피난했다가 환도했는데, 이 때 부윤을 다시 유수로 승격시켰다.
▶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김상용(金尙容) 등에게 명해 하여금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봉림대군·인평대군 등과 함께 강화로 피난하게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는 백관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싸우다가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남한산성을 열어서 청나라와 강화하였다.
병자호란 후 봉림대군(뒤의 효종)은 청나라에서 돌아와 왕위에 오르자,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북벌계획을 추진할 때 그 일환으로 강화도에 진보를 설치하는 등 방비를 강화하였다. 이 작업은 숙종 때까지 이어져서 강화도에는 내성·외성·12진보·53돈대 등이 축조, 설치되어 이중 삼중의 요새화가 이루어졌다. 또 1678년(숙종4) 강화부윤이 진무사를 겸직하도록 하고 강화만 일대를 방어하는 오영(五營)을 통솔하게 하였다.
▶1866년(고종 3)에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상륙, 강화성을 함락하고 약 1개월 동안 머무르다가 정족산성전투(鼎足山城戰鬪)에서 양헌수(梁憲洙)에게 패퇴하자 강화도에서 철수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강화성이 함락될 때 전 병조판서 이시원(李是遠) 형제가 독약을 마시고 순절하였다.
▶ 1871년 신미양요 때에는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던 미국 함대가 광성보(廣城堡)·덕진진(德津鎭)과 대안인 통진·덕포진(德浦鎭) 등의 포격을 받고 인천 방면으로 퇴각했다가 다시 북상해 초지진(草芝鎭)을 점령하였다. 초지진을 점령한 미국 해병대는 육로로 북상해 덕진진과 광성보를 함락시켰다.
광성보전투에서는 어재연(魚在淵) 이하 모든 장병이 끝까지 싸우다가 중상자를 제외한 전원이 전사하였다. 이 두 양요를 거친 뒤 1874년에 강화도 동쪽해안에 포대를 설치해 외침에 대비했으나, 이듬해에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이 일어나 초지진과 포대가 일본군함의 포격을 받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 어느 정도 올라오니 조망이 트인다. 멀리 김포의 문수산이 좌우로 펼쳐진 풍경이다.
▶1876년에는 일본의 강압으로 강화조약(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어 우리나라는 일본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1896년에 강화부로 강등되었고, 1906년에는 다시 강화군으로 강등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교동군(喬桐郡)이 편입되었다.
▼ 남산의 정상부위에 남장대가 위치해 있다. 남문으로 부터 쉬엄 쉬엄 1시간이면 올라올 거리다.
▼ 당겨 본 남장대
▶1950년에 6·25전쟁으로 북한군이 침입하자 군민들이 특공대를 조직해 그들을 격퇴시켰는데, 강화읍 입구에는 그들의 공적을 기리고 전사한 19인의 영령을 추모하는 ‘강화특공대의적비’가 세워져 있다. 1962년 10월 1일 볼음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73년 7월 1일에 강화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2월 15일하점면 양오리가 송해면에 편입되었으며, 1987년 6월 25일에 강화읍 신문리 일부를 관청리에, 불은면 삼동암리 일부를 삼성리에, 불은면 신현리 일부를 덕성리에 편입시켰다. 또 1991년 8월 8일에는 화도면 장화리 일부를 내리에 편입시켰다.
1993년 9월 13일에는 불은면 덕성리 일부를 길상면 길직리에, 길상면 장흥리 일부와 길직리 일부를 불은면 덕성리에 편입시켰다.
이듬해에는 강화읍 대산리 일부를 송해면 신당리에, 송해면 신당리 일부를 강화읍 대산리에 편입시켰다. 1995년 3월 1일 군 전체가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9년 1월 12일에는 송해면 양오리의 일부가 하점면 장정리로, 같은 해 4월 10일에는 하점면 망월리의 일부가 내가면 오상리에, 내가면 오상리와 구하리가 하점면 망월리에 각각 편입되었다.
▶ 오늘날 강화도에서는 강화문화제, 고인돌축제, 참성단 축제 등을 마련하여 진행되고 있다. 2005년 12월 말 기준 562개소의 문화재 내지 사적지가 확인되었으며, 이 가운데 83개소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 관광 자원이 풍부하다.
또한 1990년대 이후 인천가톨릭대학교가 설립되었고, 안양대학교 강화캠퍼스가 자리 잡게 되었으며, 가천의과학대학교 등이 개교되어 교육도시로서의 모습도 갖추고 있다. [다음백과]
▼ 정상에 다 올라왔다. 김포 문수산 왼쪽으로 유도와 함께 멀리 북한땅이 조망된다.
▼ 남장대
남장대는 조선시대 해상경비 임무를 맡았던 진무영(鎭撫營) 군사들이 강화지역 전체를 전망하던 곳으로, 누각은 1866년 병인양요 때 허물어졌다가 개축된 것으로 전해진다. 복원된 남장대는 높이 8.4m, 1층 34.69㎡, 2층 7.78㎡의 목조 누각 형태로 지어졌으며 국비와 시비를 포함해 총 5억원의 예산이 들었다.
사적 제132호 강화산성은 고려 고종(1232년)때 토성으로 만들어졌다가 몽골의 요구로 헐리게 되었다. 이후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함이 부각되면서 조선 숙종(1710년) 때 현재와 같은 규모로 개축되었다. 길이는 7.1km에 이르고 4대문 암문, 수문 그리고 북장대, 남장대를 비롯한 장대가 있다. 2008년 발굴 조사하여 2010년 남장대를 복원한 것이다.
▼ 남장대에서 바라본 강화읍 전경
▼ 강화읍의 주요시설 및 유적지 위치
▼ 당겨 본 강화읍내(서문, 강화향교, 북문 방향)
▼ 강화읍내 중심부(고려궁지, 성공회강화성당, 용흥궁)
▼ 당겨 본 북한지역, 황해남도 개풍군
▼ 북한지역 개성방향
▼ 김포 문수산
▼ 강화초지대교
▼ 동쪽방향으로 멀리 북한산이 조망되고...
▼ 서쪽방향으로는 진달래축제로 유명한 고려산이 마주하고 있다.
▼ 암문(暗門)
암문(暗門)은 성곽에 문루를 일부러 세우지 않고 뚫은 문을 말한다. 주로 일반인이나 적들이 알지 못하게 후미진 곳이나 깊숙한 곳에 만들어진다. 주로 전시에 적이 모르도록 비밀스럽게 물자를 이송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 깔끔하게 비교적 잘 복원된 성의 모습이다.
▼ 서문 방향으로 내려서는 가파른 능선 앞쪽으로는 강화고등학교와 공설운동장이 위치해 있다.
▼ 석축은 온데 간데 없고 토성인지 모를 정도의 무너진 성이 본래 모습이다.
▼ 남장대에서 완전히 내려서면 평지에도 이와같은 성터가 있었을테고 복원한 모습이다. 끝자락에 석수문을 지나 서문이 보인다.
▼ 강화 석수문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0호. 수문의 길이 10m, 높이 3.8m, 너비 4m. 세 개의 수문으로 되어 있는데, 각 수문은 화강석을 다듬은 선단석(扇單石)을 4단 내지 5단으로 쌓아 이를 교각으로 삼고, 그 위에 매끄럽게 다듬은 월단석을 반원형으로 잇대어서 아치를 이루게 하였다.
아치와 아치 사이도 역시 다듬은 무사석으로 메워 올려서 아치석 윗돌과 평평하게 한 다음, 그 위에 흙을 깔았다. 원래 이 수문은 1709년(숙종 35)에 강화 내성(內城)을 쌓을 때, 남문 옆 성곽과 연결해서 강화읍의 중심부를 질러 흐르는 동낙천(東洛川) 위에 설치하였던 것인데, 1900년에 갑곶 나루터의 통로로 삼기 위하여 나루에 가까운 개천 어구에 옮겨 시설하였다가, 1977년에 다시 지금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 강화산성 서문 건너편에 있는 연무당은 1876년 강화도조약이 최종 조인된 장소로 이 곳에서 체결된 강화도조약에 의해 우리나라는 부산, 인천, 원산을 일본에게 개항하였다. 고종 7년에 창건된 연무당은 본시 지금의 상 시장 군 농협 자리 서쪽에 있었는데, 비좁아 동소문 밖으로 옮겼다가 내성서문 남쪽에 당을 세우고 그 전면에 조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 연무당은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곳으로서 우리 민족의 암울했던 과거사를 잊지않기 위해 이 곳에 기적비가 세워져, 민족 자주의식을 드높이 간직해야 한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 서문(첨화루(瞻華樓))
숙종 37년(1711)에 당시 유수 민진원에 의해 건립된 것이며 현판도 그의 글씨이다. 문루의 누상에 오르면 시내 일대를 바라볼 수 있는데 이곳에서 성곽길을 따라 오르면 역시 멋진 풍경을 기대할 수 있다. 그 뒤 퇴락되었던 것을 정조 20년(1796) 유수 김이익에 의해 중수된 바 있고 1977년에 개축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 서문 외곽
▼ 서문 내,외곽 모습
▼ 멀리 남장대로 부터 이곳 남문까지 거의 직선 코스로 온 셈이다. 꽤 먼 길을 온 것 같지만 30분도 안되는 거리다.
▼ 강화향교
1127년(인종 5) 3월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고려산(高麗山) 남쪽 기슭에 창건되었다. 1232년(고종 19)에 지금의 갑곶리[甲串里]로 옮겼다가 몽고군의 침입으로 다시 서도면(西島面)으로 이건하였다.
그 뒤 강화군으로 옮겨왔으며 1624년(인조 2)에 강화유수 심열(沈悅)이 소동문(小東門) 밖의 송악산(松岳山) 옆에다 복원하였다. 1629년에는 강화부윤 이안눌(李安訥)이 명륜당을 중건하였으며, 1688년(숙종 14)에 유수 민시중(閔蓍重)이 남문 근처로 이건하였다.
1731년(영조 7)에는 유수 유척기(兪拓基)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1766년에 유수 이은(李溵)이 중수함과 동시에 소동문 밖에 있던 비석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무(東廡)·서무(西廡)·제기고(祭器庫)·주방(廚房) 등이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성전에는 5성(五聖),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며, 1명의 전교(典校)와 수명의 장의(掌議)가 운영을 맡고 있다.
▼ 북문(진송루(鎭松樓))
▼ 북장대터로 오르면서 바라본 산성
▼ 산성을 따라 종주하지는 않았지만 산성 복원은 대체로 잘 되어 있는 편이다.
▼ 첫 조망터에서 바라본 북녘
▼ 북산의 너른 평지가 나왔다. 이곳이 북장대터 일 것이란 생각인데 안내문이 없는 것으로 봐서 분명치 않다.
▼ 북장대터에서 바라본 남산의 정상인 남장대와 오른쪽 혈구산의 모습
▼ 하산하여 고려궁지로...
▼ 남산과 가운데 혈구산, 오른쪽 고려산
▼ 강화부종각
강화동종(銅鐘)은 강화산성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쳤던 종으로 강화산성 남문에 걸려있던 종이다. 숙종 14년(1688)에 강화 유수 유지완이 처음 만들었는데 금이가서 소리가 고르지 못해 강화 유수 민진원이 숙종 37년(1711)에 다시 만들었다. 동종 명문에 옛 종은 사인이 만들고 다시 만들 때는 조신이 만들었다고 새겨져 있다.
사인비구는 8개의 동종을 제작했는데 모두 보물 11호로 지정되었으며 강화 동종은 8개중 하나이다. 1977년 고려궁지로 이전되었으나 1999년 종에 균열이 생겨 더이상 타종하지 못하게 되자 강화동종을 복제하여 설치하고 원래의 종은 강화역사박물관으로 옮겨 보관, 전시하고 있다.
▼ 고려궁지
고려 고종 19년에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왕도가 강화로 옮겨졌다. 이때 옮겨진 도읍터가 고려궁지로 원종 11년 환도할 떄까지 39년간 사용되었다.
고려궁지는 규모는 작으나 송도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어졌고, 궁궐 뒷산 이름도 송악이라 하여 왕도의 제도를 잊지 않으려 하였다고 한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성이 청군에게 함락된 사실이 있으며, 그 후 고려 궁터에는 조선 궁전건물(장령전, 행궁, 만령전, 봉선전, 외규장각, 척천정, 세심재 등) 및 유수부 건물들이 있었으나 1866년 병인양요 시 프랑스군에 의해 건물 등이 소실되고 지금은 유수부의 동헌과 이방청 건물만이 남아있다. 이 곳은 1977년 보수 정화되어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국민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다음백과]
고려의 궁궐터는 사적 제133호로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1232년(고종 19)부터 1270년(원종 11)까지 39년간 사용했다. 〈고려사절요 高麗史節要〉에 의하면 최우가 1232년 6월 이령군을 동원하여 건립했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1234년 본격적인 궁궐과 백사의 건립이 이루어졌다. 규모는 작았으나 송도의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었고 궁궐의 뒷산도 송악이라 했다.
고려궁의 정문은 승평문으로 양쪽에 3층루의 문이 2개 있었고, 궁내에 많은 관아·전각·창고·문이 있었으나 1270년 송도환도 때 모두 허물어졌다. 1631년 행궁을 고려 옛 궁터에 건립하면서 장녕전을 지어 조선 태조와 세조의 영정을 모셨고, 강화유수부 건물들과 규장외각을 건립해 많은 장서와 문서를 보관했다. 그러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책과 서류를 약탈해갔으며 많은 건물이 불탔다.
지금 고려궁지에는 1638년(인조 16) 건립된 현윤관이 남아 있는데 1769년 중수하면서 '명위헌'이란 현판을 붙였다. 1977년 고려궁지를 보수하면서 담을 설치하고 고려궁지 진입로 옆에 있던 강화동종을 옮기고 경역에 보도를 설치해 경내를 조성했다.
▼ 강화유수부동헌(江華留守府東軒)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 정면 8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 건물이 있는 터는 고려 고종 때에 임시수도로 궁궐이 있던 곳이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그 자리에 유수부의 동헌을 지었다.
당초의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현재의 건물은 1638년(인조 16)에 개수한 것이며, 그 뒤 퇴락한 것을 1977년 복원, 수리하였다. 겹처마 익공집으로, 2중 장대석으로 조성된 기단 위에 네모꼴의 다듬은 주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화반(花盤) 없이 간단한 형태의 초익공으로 되어 있으며 내부 가구(架構)는 2고주 7량으로 되었다. 바닥 중앙에는 대청마루가 깔려 있고, 동쪽에 1칸은 바닥을 높인 마루가 있다. 정면은 모두 사분합의 세살문을 달았다.
동헌의 좌측에는 높은 석축으로 단을 조성한 고려 궁궐터로 전하는 건물지가 있고, 그 앞 낮은 곳에 이방청(吏房廳) 건물이 있다.[다음백과]
▼ 조선시대 강화의 행정 책임자인 유수가 업무를 보던 중심 건물이다. 인조 16년(1638) 유수 김신국이 수리하였고, 영조 45년(1769) 유수 황경원이 현윤관이라 하였다. 명위헌이라는 현판은 영조 때 명필인 백하 윤순이 쓴 것이다. 1977년 국방유적 복원정비사업으로 정비되었다. [안내문]
▼ 외규장각(外奎章閣)
여러차례의 전란으로 강화도가 보장지처(保障之處)로 크게 주목 받게되고 국왕과 왕실 기록물의 중요성이 강조됨에 따라 정조6년(1782)에 건립하였다.
왕립 도서관 역할을 하였으며, 왕실과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등의 서적과 왕실물품을 보관하였다. 병인양요(1866)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외규장각과 여러 건물들을 파괴하여 서적을 약탈하였다. 1995년부터 2001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2003년에 건물을 복원하였다.[안내문]
▼ 용흥궁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이다.
원래는 민가였던 모양이나 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1853년(철종 4)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가 현재와 같은 건물을 세우고 용흥궁이라 이름하였다. 그 뒤 1903년 이재순(李載純)이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건물은 내전 1동, 외전 1동, 별전 1동, 잠저구기비각(潛邸舊基碑閣) 1동 등이 있다. 이 궁의 건물은 창덕궁의 연경당(演慶堂), 낙선재(樂善齋)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에 따라 조형되어 질박한 느낌을 주고 있다. 팔작지붕에 홑처마 주심포의 구조로, 내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이며(건평은 90㎡), 별전은 정면 6칸, 측면 2칸인 ㄱ자형 집(건평 95㎡)이다. 비각은 정방형으로 정면과 측면이 각각 2.5m로, 넓이가 약 6㎡이다. [다음백과]
철종의 이름은 변이고, 초명은 원범(元範)이다. 자는 도승(道升), 호는 대용재(大勇齋)로 정조의 이복 동생 은언군(恩彦君) 인의 손자이다. 은언군의 아들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과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 사이의 셋째아들이다. 철종의 할아버지인 은언군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할 때 강화로 쫓겨났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청나라 신부 주문모로부터 영세를 받은 사실이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철종은 1831년(순조 32) 오늘날 서울의 안국동인 경행방(慶幸坊)에서 태어났다. 철종의 아버지 전계군은 1844년(헌종 10) 철종의 큰형인 회평군(懷平君)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민진용(閔晋鏞)의 옥’에 연루되어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때 철종은 둘째 형과 강화로 유배되어 지난날 은언군이 살던 집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그의 나이 열네살이었다.
철종은 5년 뒤인 1849년 19세의 나이에 순조의 비였던 순원왕후(順元王后)에 의해 왕으로 지목되었다. 사실 가계 상으로는 철종이 헌종의 아저씨뻘이었는데, 그렇게 되면 아저씨가 조카를 이은 셈이니 왕통에도 문제가 있는데다 풍양 조씨 신정왕후의 아들인 헌종을 잇는 것이 되어 풍양 조씨가 세력을 잡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안동 김씨인 순원왕후의 아들로 만들어 왕통을 잇게 한 것이다.
봉영의식을 행한 뒤 그해 6월 8일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이튿날인 6월 9일 창덕궁 희정단(熙政堂)에서 관례를 행한 뒤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1851년에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았는데 이가 명순왕후(明純王后)이다.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했는데 점차 나이도 들고 친정의 경험도 쌓이면서 1859년부터 관리들의 부정을 공격하는 등 비교적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1861년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련도감의 마보군(馬步軍)과 별기군(別技軍)의 군사를 이용하여 궁궐의 숙위를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봉건적인 통치기능이 무너지고 삼정(三政: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의 문란이 더욱 심해져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1862년 진주 단성지방을 시발로 하여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철종은 봉기 발생지역의 수령과 관속을 처벌하여 해이해진 봉건기강을 확립하는 한편, 농민의 요구조건을 일부 수렴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려고 했다.
농민봉기가 잠시 가라앉은 5월 이후에는 삼정(三政)이정청을 설립해 삼정의 개혁을 공포하고 재야 유생층과 관료들에게 개혁책을 모집했다. 이때 마련된 삼정이정책은 주로 삼정운영의 개선에 초점을 두었으며, 법정 세액 이외의 각종 부가세는 일체 혁파하고 도결(都結)이나 방결(防結)을 폐지하고 환곡의 경우 토지세로 전환시키는 등 조세개혁의 원칙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후속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가운데 지배층의 이해관계가 얽혀 삼정이정책은 시행되지 못했다.
철종은 대왕대비의 친정인 김조순 가문이 경쟁세력을 도태시키면서 전보다 강화된 독점 권력을 누리는 시기에 재위하여 세도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기의 뜻을 펴 보지도 못하고 1863년 12월 8일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모셔온 글]
강화도령(철종)과 양순이의 이야기
원래 농사꾼으로 강화도에서 살던 시절 양순이란 천민의 처녀와 혼약을 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었다고 한다. 철종이 헌종의 뒤를 이어 얼떨결에 상감마마가 되고 양순에 대한 상사병과 엄격한 궁중생활에 대한 스트레스로 시름시름 앓아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일이 잦아지자 헌종비 효현왕후와 익종비 신정왕후를 비롯한 왕가의 사람들은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양순을 독살시켰다고 한다.
천민인 양순을 궁에 들일 수도 없고 천민으로 살았던 철종이 천민의 여자에게 정을 준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고 천민으로 살던 시절의 것은 모두 잊어야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럼 후궁으로 들이면 되지 않겠느냐 하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천민은 원칙적으로 궁녀가 될 수 없었다.
고작해야 무수리가 된다면 모를까..영조의 어머니가 무수리인 사실도 있지만 그일 자체는 조선왕실 사람들에게 상당한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고 그들은 그런 일의 반복을 다시는 원치 않았다. 차라리 죽게 되면 잊을 것이다 해서 사람을 보내 은밀히 죽였다고 한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철종은 비탄을 이기지 못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삼정의 문란과 국가의 잇다른 민란을 자초하게 되지만 그런 것을 어떻게 수습할 의욕도 가지지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죽는다. [모셔온 글]
▼ 철종조잠저구기(哲宗朝潛邸舊基)
▼ 1900년 11월 15일 축성된 강화성당은 전통 한옥으로 지어진 현존 최고(最古)의 교회이자 일제 침략의 상처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1910년 한국을 경제로 병합한 일제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전쟁물자 공출을 이유로 이 교회 정문 계단 난간과 종을 뜯어갔다.
한일성공회의 교류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일본 성공회의 성직자와 신자들은 과거의 일제가 일으킨 침략전쟁을 참회하고, 한일 양국의 진정한 화해와 동아시아의 평화 공존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2010년 11월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축성 110주년 기념일에 정문 난간을 복원하였다.[안내문]
▼ 성공회강화성당(聖公會江華聖堂)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1호. 대한성공회의 초대 주교인 코프(Corfe, C. J.)에 의하여 1900년(광무 4)에 건립되었다.
대한성공회의 역사는 1889년코프가 초대 한국 주교로 영국에서 서품을 받음으로써 시작되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한 사람의 신자도 없었고, 한국인에게 처음 세례를 베푼 것은 주교 축성이 있은 지 7년 뒤인 1896년 6월 13일강화에서였다.
대한성공회에서는 이러한 인연으로 강화에 제일 먼저 성당을 건립한 것인데, 대한성공회에서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게 되었고, 현존하는 한옥 교회건물로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서유럽의 바실리카(Basilica)양식과 동양의 불교사찰양식을 과감하게 조합시켜 건립하였다.
교회의 내부공간은 바실리카양식을 따랐고, 외관 및 외부공간은 불교사찰의 형태를 따랐다. 목재는 압록강에서 운반 해다가 사용하였으며, 경복궁 공사에 참여했던 대궐 목수가 건축을 맡았다.
경사지의 대지를 축성하여 입구 계단, 외삼문ㆍ내삼문ㆍ성당ㆍ사제관을 동남향 종축으로 배치한 외부공간의 구성이 불교사찰의 구릉지가람(丘陵地伽藍)과 비슷하며, 성당 앞마당에는 큰 보리수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외삼문 솟을대문은 팔작지붕으로 담장과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 칸에는 초대 사제(司祭)의 묘비가 서 있다. 내삼문은 평대문에 역시 팔작지붕이고, 서쪽 칸은 종각으로 쓰이고 있으며, 성당은 정면 4칸, 측면 10칸의 바실리카식 평면구성이다.
성당 내외부에는 서양식 장식이 거의 없는 순수한 한식 목조건축이면서도 교회기능에 충실한 내부공간을 연출함으로써, 초기 성공회 선교사들의 토착화 의지가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 역사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성당건물이다.[다음백과]
오늘의 트레킹으로 인해 다시 한번 역사를 더듬어 공부를 하는 기회가 됐다. 강화도가 고려때 몽고의 침입으로 인해 40년동안 수도로 국가의 위기를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각국의 외침에도 불굴의 정신으로 항전한 곳이기에 성지와도 다름 없는 땅이다. 그러나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극의 역사도 함께 하고 있기에 오늘날 강화도를 주목하고 역사가 말해 주는 그 교훈을 모두가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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