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31일(토)
오늘은 25회 교동면민의 날 행사가 있는 날이다. 25년전이면 1993년인데 어떻게 해서 그때부터 면민의 날 행사가 개최됐는지는 모른다. 면민의 날 행사는 17개里의 모든 주민들이 참석해서 운동과 게임과 음식으로 즐거움을 나누는 날이다. 물론 과거에 8.15 기념 축구대회가 굉장했는데 그것이 선후배체육대회로 이어지고 면민의 날은 축구를 제외한 가벼운 운동경기를 한다.
이제는 고령인 분들이 많아 참석을 유도하고 중간에 빠져 나가는 주민이 없도록 각종 기념품을 중간 중간에 추첨하여 나눠주고는 하는데 활력이 옛날 같지가 않다. 면민의 날 행사는 해마다 6월에 있었는데 6.13 지방선거가 있어 농번기가 되기전에 행사를 마무리하려고 일정을 당긴 모양이다.
다행이 포근한 날이어서 행사를 치루기에는 최적의 날씨다. 마침 행사위원장으로 체육진흥회장인 절친이 모든 진행 책임을 맡게 되어 축하해 주어야 할 일이다. 초교동창회에서는 상반기 동창회를 이번 기회에 고향에서 하자는 의견으로 모처럼 행사를 지켜보게 됐다.
조금 늦게 도착하여 입장식 및 친구의 축사를 사진으로 담지 못해 아쉬웠다. 모처럼 만나뵌 동네 어르신들과 이웃 선후배님들을 만나 반갑게 맞아 주니 잠시 어린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다. 점점 고령화로 어르신들은 세상을 떠나고 젊은 사람들은 보기 힘드니 농촌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해 주는 듯 하다.
건강하게 오래 장수들 하시어서 만나뵐 때 마다 옛시절을 떠올리며 추억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 외지에서 취재를 하기 위해서인지 드론도 보인다. 깔끔한 중고등학교 잔디운동장에 각리의 주민들이 입장식을 마치고 기관장들의 축사를 듣는 시간이다.
▼ 1개리에 천막 1개로 17개가 쳐져있다. 1개면에 17개리가 있다는 것은 강화군 전체 13개면에서 다른 면보다 면적이 넓고 인구수도 많다는 얘기인데 내 어릴적엔 1만명이 넘던 인구수가 이제는 3,000명으로 줄었다.
▼ 이상복 강화군수의 축사
▼ 그외 군위원등 정치인들의 축사가 이어지고...
▼ 동네분들 쉼터인 텐트로 가서 어르신들과 선후배님들 만나서 인사도 드리고 음식을 먹으며 담소도 잠시 나눈다.
▼ 젊은 시절의 모습들은 다 어디로 가고 모두 60고개를 훌쩍넘어 70이 다 되어가는 모습에서 세월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이 실감난다.
▼ 개회선언이 시작되고 폭죽이 한바탕 요란하게 터지면서 환호성이 운동장이 떠나갈 듯 울린다.
▼ 운동등 행사내용은 다 담을 수는 없었고 흥미진진한 릴레이 경주였는데 각 리의 새마을지도자등 직책별 참가자격을 부여해서 제대로 달리지 못하는 선수가 나오면 폭소를 자아내곤 한다.
▼ 초교동창회를 고향에서 갖고자 하여 모인 인원이 그리 많지 않다. 역시 남학생보다는 여학생이 단연 많은데 행사위원장으로 체육진흥회장인 친구(가운데) 와 함께 기념사진을 담아봤다.
▼ 수년전서 부터 그려진 대룡시장의 벽화가 옛 어린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여 정겹다. 뻥튀기 재료는 주로 쌀과 옥수수와 검은콩이었다. 아무때나 뻥튀기를 먹어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설명절이 다가오면서다. 엿과 함께 강정을 만드려면 필수적인 재료이나 그냥 먹는 양이 더 많았다.
동네마다 순회하며 뻥튀기 아저씨는 도구를 설치하고 풍구를 돌리며 압력계 표시가 적정 눈금에 이르면 도구 입구를 순간적으로 열어 뻥하는 소리와 함께 곡식을 튀기는데 주변 사람들이 놀랄까봐 육성으로 먼저 소리를 내고 튀기지만 그 순간만은 귀를 막고 바짝 긴장을 하고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모두가 신기하기도 하고 구수한 냄새와 함께 혹시나 좀 얻어 먹을까 하여 모여든 또래 어린이들이 바글 거린다.
▼ 잠시 동창생들이 친구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한잔 하는 사이 대룡리 시장을 둘러봤다. 상수도가 들어온다니 그것과 연계해서 보도블록도 함께 공사가 진행 중인가 보다. 면민의 날 행사로 상점은 모두 문을 닫아 사람 발걸음도 없고 공사관계로 주변이 어수선 하다.
▼ 교동에도 과거에 극장이 있었다. 이 장소는 아니지만 영화도 보고 인형극을 보기도 한 것이 눈에 선하다. 누가 이 건물에 벽화를 그렸는지 마치 극장으로 착각할 만큼 잘 표현해 냈다.
▼ 교동스튜디오를 들어가 봤다. 내가 아는 지인이 운영을 하고 있었는데 아마츄어 사진 실력을 갖췄지만 요즘 카메라가 성능이 좋아 사진은 잘 나오는 편이다. 학창시절로 돌아가 교복을 입고 찍은 모습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돌아간 듯 한 모습들이다. 중년이 되었어도 모두가 어울린다. 나 역시 동창들과 한컷 하려고 했으나 친구들과 제대로 조우가 되지 않아 사진촬영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 어렵고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무 욕심도 없고 순박했던 참 행복하고 소중했던 그 때였다.
▼ 변변하게 읽을 동화책도 없었던 그 시절 만화책이 유일한 도서였고 중독이 될 정도로 어쩌다 용돈이 생기면 빌려보는 일이 다반사였다.
▼ 놀이는 주로 어깨동무들과 함께 했다. 어울리지 않으면 놀 수 없는 놀이들로 비석치기, 땅따먹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사방치기, 자치기, 술래잡기, 말뚝박기, 닭싸움...경쟁심을 유발하고 승부를 가르는 놀이들로 수도 없이 많았다. 여학생들은 주로 고무줄놀이로 즐겼으나 남학생들의 짖궂은 고무줄 끊기에 골탕도 많이 먹었었다.
▼ 말뚝박기...
가위바위 보를 잘하는 서있는 수비팀 가랑이에 머리를 박고 줄지어 꽁무니에 머리를 쳐 박는데 공격팀이 제대로 올라타지 못하고 떨어지면 패하여 공,수가 바뀌게 되고 수비팀이 제대로 위에 올라간 공격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면 패하여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정상적으로 올라가고 지탱하게 되면 서 있는 수비팀 과 맨앞의 위치한 공격팀이 가위 바위 보로 이기거나 진팀이 공격, 수비팀으로 갈리게 된다. 공격팀은 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이 유리하다. 요즘이라면 나같이 무게감이 있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림에서 날카로운 눈매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날아가듯 뛰어 올라 내려 찍 듯이 안착하려는 그림의 표현이 웃음을 짓게 한다.
▼ 어릴적 동네에는 몇 개의 우물이 있었다. 우물이 있는 집은 통상 부잣집이었다. 우물이 없는 이웃들은 우물을 길어다 식수로 이용해야 했는데 아주머니들은 커다란 물동이를 머리에 이어야 했고 남자들은 물초롱을 물지게로 운반하여야 했다. 초교 5학년 무렵부터 물지게를 졌으니 중심이 흔들려 물을 엎지르기 일쑤였으나 후에는 곧잘 하여 식수 뿐만이 아니고 가뭄에 채소에 물까지 주는 일도 했다.
▼ 내가 중학교 다닐 무렵 우리집도 우물을 팠고 펌프로 된 우물이어서 얼마나 편했는지 모른다. 여름이면 우물물을 길어 등목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펌프질로 등목을 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편리했던가! 지금 시대의 수도꼭지만 틀면 나오는 그런 세상에서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 그런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아이들은 예절이 밝았다.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들에게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반항하는 일이 없었고 말씀 잘 듣는 착한 아이들 이었다. 이 한폭의 그림에서도 그런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학교 바로 아래에 있는 이 가게들은 만화책도 빌려주고 군것질, 학용품등을 파는 가게였는데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있으니 어릴적 발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듯 그 시절을 연상시키기엔 충분하다.
▼ 시장 골목도 새로 단장하고 나면 환경과 분위기가 한결 나아진 모습을 보일 것으로 기대한다. 어느 집에 누가 살았고 무슨 장사를 했으며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모두가 아는 그런 골목이었다.
▼ 참기름을 짜는 집 옆을 지나가면 고소한 냄새에 발걸음이 멈춰지고 짜장면집 옆을 지나가면 짜장냄새에 코를 씰룩 거릴 수 밖에 없었고 떡집을 지나노라면 떡냄새에 공복을 느끼기도 했다.
아이스께끼 공장에서 나는 기계소리, 방앗간에서 나는 발동기 소리, 솜틀집에서 솜을 틀때 돌아가는 소리, 국수집, 떡방앗간 소리...아직도 귓전을 맴도는 듯 하다.
▼ 피난민으로 고향이 황해도 연백이라는 이발소 아저씨는 아직도 그때의 용품으로 옛날 방식 그대로 이발을 해서 TV에 가끔 나오시곤 했다.
▼ 세월이 흘러 교동대교가 생기고 외지 관광객들의 발길이 뜸해지자 지자체에서 교동제비집이라는 홍보관도 건축하고 주민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교동도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이곳에서 영상이나 안내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층에는 커피숍도 운영하고 있어 커피 한잔 기울이며 대화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근방에는 자전거도 대여되어 가고 싶은 곳을 라이딩할 수도 있다.
▼ 교동제비집에서 바라본 교동평야, 섬이기는 하나 섬안에 들어와 보면 섬 같지 않은 육지와 같은 섬이다.
▼ 대룡시장에서 오늘 면민의 날 행사가 진행되는 교동중고등학교 방향으로 가는 길...교동 전체 주민이 참석하는 자리이기에 도로가에는 주차로 끝도 없이 가득 메웠다.
▼ 친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삼겹살 파티를 하기로 한다. 모처럼 고향에 왔으니 친,인척들이 있고 편안하게 술한잔하며 여담을 즐긴다.
▼ 동네 친구이기도 한 동창회장의 건배제의...친구들아! 지금까지 외지에서 열심히 살아 오느라 수고했다. 오늘 만큼은 모든 것을 잊고 술 한잔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앞으로도 건강하게 오래 오래 우정을 돈독히 하며 열심히 살아가자. 모두를 위하여 건배!!
▼ 교동초등학교 교정의 모습...
교동의 학교는 3개의 초등학교와 1개의중,고등학교가 있다. 교동초교는 1906년에 개교해서 2006년에 10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올해는 112주년이 되는 해이니 꽤나 유서깊은 학교이다.
부모와 아들, 딸, 손주까지 모두가 동문이 되는 셈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태어난 년도와 졸업횟수가 같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57년생이면 57회 졸업생이 된다.
▼ 학교 주변 울타리에 심어진 측백나무는 어린시절 그대로 백년은 넘을 듯한 고목들로 빼곡하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코 흘리개 시절로 돌아간 기분 이어서 나무 그루터기 하나라도 정감이 간다.
▼ 고향가면 늘 그렇듯 홀로 화개산을 오르지 않으면 허전한 듯 버릇처럼 오른다. 학교 위의 막촌이란 동네를 거쳐 오르게 되는데 이 일대가 황토임은 사진으로 바로 입증된다.
▼ 화개산 정상의 모습, 등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오르기도 편리하다. 왼쪽으로 주차장이 설치되어 있는데 연산군유배지의 유적지가 있어 휴일이면 지역 농산물 판매와 함께 관광객에게 편리성을 제공해 준다.
▼ 생강나무 꽃이 활짝폈다. 노란 색감이 마치 갓 부화한 병아리 같다. 봄은 봄이다.
▼ 연산군유배지로 정한 곳이나 역사적 사실로 증명이 되지 않은 장소이다. 오히려 읍내리의 읍성 안에 우물이 있고 그곳 주민들이 부군당이라는 당을 짓고 연산군을 기리는 제를 지내고 있어 그곳이 연산군유배지로 유력하다.
문화유적지로 지정될 경우 재산권행사에 제한을 가져올 수 있어 사유지에 유배지 시설물을 유치할 수 없어 국유지인 이곳을 정해 놓은 것이니 어찌 보면 쌩뚱맞은 곳에 유적지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셈이다.
▼ 교동도로 유배를 떠나는 연산군의 모습과 그 생활 모습을 잘 재현해 놨다.
▼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행이라야 사실 산책이나 다름없다.
▼ 호젓한 오솔길이 홀로 사색하기에 딱 알맞은 곳들이다.
▼ 살방 살방 오르다보면 화개산성을 지키던 군사들이 마시던 약수터가 나온다. 멀리서 위장병을 앓던 장수가 이 물을 마시고 병을 고쳤다는 전설도 어릴적 부터 들어온 터다. 아무리 가물어도 8부 능선에서 물이 졸졸 나오니 신기하기도 하다. 어릴 적엔 이곳까지 병이나 주전자를 들고 와서 물을 받아가곤 했었다.
▼ 언제나 그 자리엔 달래가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달래는 사실 산달래다. 달래는 산달래와 달리 꽃도 뿌리도 다르다.
▼ 중의무릇도 벌써 폈다. 봄날 노란색의 꽃은 개나리 뿐이 아니고 생강나무, 산수유, 꽃다지, 중의무릇등이 대표적이다.
▼ 이쯤 오르면 화개산이 정글화 되어 감을 느낀다. 우거진 숲 사이로 보이는 마을 풍경이 멋스럽다.
▼ 십여년 전만해도 관목이 그리 많지 않아 노간주의 초록빛 상록관목과 진달래, 조팝나무가 어우러지면 누군가는 에덴동산이라 불렀단다. 주변 조망과 유적지를 보호를 위해 벌목을 하여 시원한 느낌이다.
▼ 교동대교가 생기기 전까지는 강화 창후리로 부터 교동의 월선포로 이르는 뱃길로 사람들이 오갔다. 떠나는 배, 오는배에 따라 보는 이로 하여금 애환을 달리했던 풍경이다.
▼ 추억이 서리지 않은 곳이 어디 있으랴. 눈이 오면 눈이 온대로 분꽃나무가 피었으면 핀대로 사진도 찍고 추억도 쌓았다.
▼ 정자에 앉아 노닥이던 그 시절...땀이 이마에 송글 송글 맺혀 있던 모습들도 엊그제 일 같기만 하다.
▼ 이곳에서 보는 풍경들도 모두 가 본 곳이니 세월이 그 만큼 흘렀고 나이도 찼어라.
▼ 정상석을 보니 그냥 가기가 서운하다. 어렵게 셀카로 담아 보니 눈 위에 발자국이 아직 남아 있는 듯 하다.
▼ 정상석과 나란히 하고 있는 산불 감시탑과 정자인 대운정
▼ 암각화로 주술적인 내용이 새겨진 것이라는데 수수께끼 같은 얘기다.
▼ 이러한 오솔길은 보기만 해도 힐링이 된다. 흙길을 밟다보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전해져 오는 촉감이 너무 좋다.
▼ 어느 한 구석 추억이 깃들어져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그 때 처럼 좋은 날들이 있을까 싶다.
▼ 봉수대
▼ 등로에 주로 있는 산자고...교동에서는 까투리라는 이름이 붙었었다. 뿌리를 캐 보면 마치 달래와 같은 뿌리에 털이 덮혀있는 상태다. 털을 벗겨내고 하얀 속살을 씹어 먹으면 달달한게 어린아이들 입에서도 거북함이 없다.
▼ 내가 태어난 동네의 앞들...미세먼지가 많아 조망이 좋지 않은게 아쉽다.
▼ 중고등학교 운동장에서는 면민의 날 행사로 체육행사가 계속 진행 중이다.
▼ 접동나물(멱쇠채의 교동 이명) 두쌍이 핀 언덕에 속삭이던 얘기들이 지금도 귓전에 맴 도는 듯 추억이 새롭다.
▼ 하산하면서 접어 든 오솔길...
언제부터인가 야자수 매트가 오솔길 따라 운치있게 깔렸다. 마치 융단을 밟고 걷는 기분으로 숲이 우거지면 이 길만 걸어도 힐링은 절로 될 듯 하다.
▼ 못 보던 건물이 새로 생겼다. 아마 몇 년전에 북한의 우발적인 포격등에 대비해 대피소가 만들어진 모양이다.
▼ 이렇게 해서 면민의 날,동창회를 겸해서 고향을 찾게 됐고 이곳 저곳을 둘러봤다. 모처럼 고향에 왔다가 사람 얼굴 몇 몇만 보고 간다면 아쉬울 것 같아 이렇게 나마 마음을 달래 본다. 언제 또 와 볼런지 모른다.
고향이란 늘 마음속에 그리움 자체다. 그리움을 안고 산다는 것도 한편으론 좋은 일이다. 그 마저도 없다면 삶이 얼마나 무미건조한 일이겠는가! 고향 하늘의 햇볕은 벌써 기울고 황혼의 노을이 져 온다. 이제 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