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26일(일)
내장산 산행 후 정확히 3주 만에 북한산 산행에 나선다. 그동안 이런저런 사정으로 매주 하던 산행을 못했으니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듯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데가 없이 찌뿌둥한 게 감기몸살 증세는 떠나지를 않으니 몇 년을 산행한 체질이 바뀐 산꾼이 된 것을 실감한다.
어제는 집안에 커다란 행사인 시향을 지내는 날인데 친구 아들 결혼식에 참석을 하느라 불참하고 이어 저녁에는 서울에서 군 동기생들 송년회가 있어 참석했다가 과음을 하고 대중교통이 끊겨 택시를 타는 등 늦은 귀가에 눈을 잠시 붙이고 이전부터 약속한 북한산성 14 성문 종주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승용차에 시동을 걸었다.
어제의 날씨는 번개와 천둥이 치고 폭우가 마치 장맛비와 같았는데 오늘 오전까지 온다는 비는 다행히 내리지는 않았지만 안개가 끼어 산행에 조망은 기대하기 힘든 날씨였다.
블친인 즐풍님은 예전부터 같은 산악회에서 활동한 적이 있어 아는 사이지만 도솔님은 처음 뵙는 분이라 성문을 종주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만남에 대한 기대감도 있어 날씨가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약속 장소에 어김없이 나타난 두 분 중 지금까지 북한산을 200회를 넘게 산행하셨다는 즐풍님의 리더로 웬만한 산꾼이면 마쳤을 14성문 종주에 첫 걸음을 떼었다.
∥산성 정보∥
♣ 행정구역: 들,날머리-서울 은평구 진관동 264-2(탐방지원센터), 경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서암문외 성문), 서울 강북구 수유동(대동문)
♣ 산행코스: 서암문(시구문)-북문-백운동암문(위문)-용암문-대동문-보국문-대성문-대남문-청수동암문-부왕동암문-가사당암문-중성문-대서문-수문
♣ 산행거리: 14.7km(들머리:07:00, 날머리:17:10)
∥북한산성 개요∥
소재지-경기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1-1외~ 서울 은평구,성북구,강북구에 걸쳐 있음
북한산성이란 이름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132년(백제(百濟)개로왕(蓋로王)5)에 이미 나타나고 있고,신라(新羅)는 이 곳의 비봉(碑峰)에 진흥왕이 순수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603년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25)에는 고구려 장군 고승(高勝)이 북한산성을 포위 공격하자 왕이 10,000명의 군사로 구원한 기록이 있고, 661년에는 고구려의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군과 함께 북한산성을 20여일간 공격하자 성주이던 동타천(冬陀川)이 성안의 주민 2,800명으로 필사의 결전으로 물리친 기록이 있다. 특히 이 전투는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부흥군의 도전을 받고 있던 때이므로 만약 고구려에게 함락 되었다면 삼국통일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을 것이다. 이 전공으로 동타천은 대사(大舍, 제12관등)에서 대나마(大奈麻,제10관등)로 승급되었다.
11세기초 거란의 침입이 있자 고려 현종은 고려 태조의 재궁(梓宮)을 옮겨오고 증축하였다. 1232년 고종(高宗)19에는 이곳에서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1387년(우왕(禑王)13)에도 개축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외침을 자주 당하자 도성의 외곽 산성으로 축성론(築城論)이 일어나 1659년(효종(孝宗)10) 송시열(宋時烈)에게 명하여 수축하게 하고, 1711년 숙종(肅宗)37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 공사를 하여 둘레 7,620보의 석성이 완성되었다.
성의 규모는 대서문(大西門)·동북문(東北門)·북문(北門)등 3개의 성문과 10개의 암문(暗門)이 있고시단봉(柴丹峰)위에 동장대(東將臺)· 나한봉(羅漢峰) 동북에 남장대·중성문(中城門) 서북에 북장대가 있었다.
성은 다시 중성(中城)을 만들고 처음엔 경리청(經理廳)을 두었다가 1747년(영조(英祖)23)에는 총융청(摠戎廳)에 속하여 관리되었다. 이듬해에는 상원봉(上元峰)아래에 130칸의 행궁과 140칸의 군창(軍倉)을 지은 바 있다. 성내에는 승군(僧軍)을 위한 136칸의 중흥사(重興寺)가 승군 총섭(總攝)이 있는 곳이었고, 11개의 사찰과 2개의 암자가 있었다.
성 안에는 8개소의 창고가 있었으며, 99개소의 우물과 26개소의 저수지가 있었다. 현재의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의 토성이 약간 남아 있기는 하나 대개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성곽의 여장은 허물어 졌으나, 현재 대서문(大西門)이 남아 있고 장대지(將臺址)·우물터·건물터로 추정되는 방어 시설의 일부가 있다. 성벽은 아직도 잘 남아 있는 부분이 많다. [출처: 문화재청]
▼ 정상적인 코스로 오르면 보기 쉽지 않은 산신을 상징하는 바위에 그려진 벽화를
즐풍님의 안내로 보게 된다. 채색된지는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데 백마인지
당나귀인지 함께 그려진 모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 그 옆에는 산신을 보좌라도 하듯 칠선도라 하면 어울릴 듯한 벽화가 입체감있게 잘 표현됐다. 이런 벽화를 예상외로 보게 되니 처음부터 보물이라도 만난냥 앞으로의 행보에 기분이 좋아진다.
▼ 서암문西暗門 (시구문屍軀門)
1711년(숙종37) 북한산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설치한 8개의 암문 중 하나이다. 암문은 비상시에 병기나 식량을 반입하는 통로였으며 때로는 구원병의 출입로로 활용됐다. 주로 적의 공격이 예상되는 취약한 지점에 설치하였다.
서암문도 창릉천에서 쉽게 오를 수 있는 구릉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서암문은 어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성문 상부에 문루를 마련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암문 출입구가 네모난 형태를 보이는데 서암문은 외관상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蜺)형태를 띠고 있다.
문 내부에는 문짝을 달았던 지도릿돌과 장군목이라는 빗장을 건너질렀던 방형의 구멍이 남아있다. 서암문의 주변은 지형이 낮고 험하지 않아 취약지대에 속했다. 이를 감안해 다른 암문에 비해 성벽을 높게 쌓았다.
또한 성문과 연결된 성벽을 ㄱ자 모양으로 돌출시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도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 서암문은 성내에서 생긴 시신을 내보내는 문이라 해 시구문이라고도 불렀다. [출처:안내문]
▼ 서암문을 지나면서 부터 급격하게 몸상태가 안 좋아져 앞으로 어떻게 하루 종일 걸을 수 있을지 은근히 부담이 된다. 그동안 체력관리가 안되었다는 얘기다. 지금까지 힘들어서 산을 못오른다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다.
머리는 어질하고 숨은 턱에 차 속까지 메스꺼우니 원효암에 이르러서 좀 쉬었다 출발하기로 한다. 원효암 안쪽으로 가면 이와같은 불상의 두상만 모셔져 있는데 설치된지는 얼마되지 않은 듯 하다.
원효암의 유래
원효대사가 수행했다는 원효봉 아래에 있는 암자로, 북한산성을 쌓을 때 지어졌다. 북한산성의 수비와 관리는 병사들과 승려병사인 승군이 함께 맡았는데 이 승군의 주둔을 위해 1711년(숙종37년) 북한산성을 쌓으면서 11개의 사찰과 2개의 암자를 새로 지었다. 이때 지어진 10개의 사찰은 용암사, 보국사, 보광사, 부왕사, 서암사, 원각사, 국녕사, 상운사, 태고사, 진국사( 현 노국사)이며 2개의 암자는 원효암과 봉성암이다.
원효암은 7세기 후반에 원효대사가 좌선해 수행했다는 원효봉 아래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원효암 근처에는 원효대사가 좌선하였다는 원효대가 있고, 원효암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조선후기의 실학자인 성호 이익이'삼각산 8경'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출처:안내문]
▼ 그 아래 펼쳐진 운해의 모습이 또한 장관이니 북한산을 그리 올라보지 않은 나로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 풍경에 운이 따른 것이다.
▼ 원효암을 지나 원효봉 못 미쳐에 위치한 전망바위에 올라 바라본 풍경이다. 부지런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은 가슴과 눈을 호강시키는 일이다.
▼ 그냥 지나치면 모를 전망바위의 모습을 리딩하신 즐풍님이 코스를 벗어나 다른 각도에서 보니 제법 운치가 있다.
▼ 원효봉에서 바라본 의상능선...의상봉으로부터 용출봉, 용혈봉, 증취봉, 나월봉, 나한봉, 715봉, 문수봉으로 이어진다.
▼ 구름위에 볼록 솟은 저 봉우리는 서오릉이 위치해 있는 앵봉산(235m)이 아닐까 싶다.
▼ 재작년 봄에 의상능선을 걸으면서 원효봉은 언제 올라 보나 생각했는데 건강하다면 언젠가는 다 올라 볼 기회가 생기게 마련이다. 원효봉은 펑퍼짐 한 순한 암릉으로 되어 있어 오늘 같은 날 쉬기 딱 안성마춤인 장소이다. 이곳에서 커피한잔에 간식을 먹기로 한다.
▼ 원효봉에서 바라본 조망...
왼쪽 염초봉에서 백운대로 이어지는 능선과 오른쪽 만경대, 용암봉과 노적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언젠가 염초봉으로 해서 백운대를 오르는 코스가 있다는데 파랑새능선이니 서벽밴드니 다소 위험한 코스지만 오를 날이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 원효봉을 내려서니 북문이 나타난다. 북한산성은 동,서,남,북문이 있는데 앞에 모두 대(大) 자가 붙었으나 왜 북문만은 안 붙였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여기 안내문에서 그 원인을 알 수가 있었고 맨 위에 게재된 북한도를 보면 더 이해하기가 쉬웠다.
북문
원효봉과 영취봉 사이의 해발 430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산의 능선이 말안장 모양으로 움푹 들어간 형태를 보이는 안부 지점에 자리한다. 주변에 상운사와 훈련도감 유영지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훈련도감 유영과 상운사에서 북문지역의 수비와 관리를 맡은 것으로 파악된다.
북한산성에는 대서문, 대남문, 대동문, 대성문, 중성문, 북문등의 6개의 대문이 있으며, 큰길은 대서문-중성문-대남문.대성문을 연결하는 간선도로였다. 대문 중 북문과 대동문은 간선도로에서 벗어나 있는데 이는 한양도성과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대문으로서 북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낮았던 것은 북문이 대'大'자를 붙이지 않은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실제로 북한지를 보면 북문에만 도로망이 도로망이 연결돼 있지 않다.[출처: 안내문]
▼ 상운사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승군의 주둔을 위해 1711년(숙종37) 북한산성을 쌓으면서 지어졌다는데 바로 아래쪽의 대동사는 알 수가 없다.
▼ 상운사에서 바라본 염초봉(廉峭峰)...본래 이름은 영취봉(靈鷲峰)이며, 높이는 해발 662m이다. 파랑새바위니 어금님바위, 돌고래바위, 장군봉, 피아노바위, 책바위 등 정보를 통해 아는 바위들만 머릿속을 맴돌 뿐이다.
▼ 백운동암문(위문)
북한산성의 성문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설치한 8개 암문 중 하나인데 일제 강점기 부터 위문(衛門)으로 불려왔다.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성문 상부에 문루(門樓)는 마련 하지 않았다.
성문 양쪽은 장대석으로 쌓고 그 위 천장 부분은 장대석 여러 매를 걸쳐 만들었다. 이런 양식의 성문을 아치 모양의 홍예식과 구분하여 평거식(平拒式)이라 부른다.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일반문의 빗장에 해당되는 장군목을 걸었던 방형 구멍이 남았다.[출처: 안내문]
▼ 백운대과 만경대 사이에 위치한 성문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암문 중 하나다.
▼ 백운동암문에서 용암문으로 향하면서 만경대 아래에 담은 운해와 어우러진 왼쪽 의상봉과 오른쪽 원효봉 그리고 맨 우측 염초봉이다.
▼ 북한산(삼각산)의 최고봉인 백운대의 전경
▼ 염초봉을 원근으로 담아 본 모습
▼ 잠시 노적봉의 중간위치에서 바라본 만경대...
보는 각도에 따라 만경대의 모습은 달리하지만 이곳 노적봉에서 바라본 모습이 제 이름값을 한다.
▼ 다시 한번 당겨 본 백운대의 모습, 영겁의 세월동안 모진 풍파를 겪은 모습이 주름진 바위에서 적라하게 표현된다.
▼ 만경대의 한 모습
▼ 백운대의 정상 모습
▼ 인수봉의 정상
▼ 용암문
용암봉 아래에 있어서 용암봉암문이라도도 부르며 우이동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암문은 일반 성문과 달리 은밀한 곳에 만들어 전쟁 때에 비밀통로로 사용되었다. 암문은 그 모양이 홍예가 아닌 방형이라는 것이 특징이며 상부에 문루도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용암문은 동암문인 보국문과 달리 성 내부 쪽을 홍예형으로 만들었다. 용암문 상부의 여장은 무너졌던 것을 1996년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안내문]
내부쪽에 홍예형(무지개)으로 만들었다는 안내문과 달리 방형(네모)으로 되어 있는데 안내문이 잘못 표기된 것인지 모르겠다.
▼ 용암봉과 만경대, 맨 오른쪽 인수봉의 모습
▼ 동장대
북한산성의 동쪽에 있는 장대로 1712년(숙종38년)에 지어졌다. 장대는 장군의 지휘소로 북한산성에는 동장대 외에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다. 현재는 동장대만 남아있다.
동장대는 최고 지휘관이 사용하던 곳으로 장대 중에서도 가장 중요시 되었다. 장대의 평면은 정방형이며 중층 구조로 아래층은 벽 없이 트여 있어서 지휘하기에 편리하도록 했으며 위층은 창으로 막아 방을 만들어 사용했다. 장대의 구성이나 모습은 수원 화서의 서장대와 거의 같다. 이 장대는 소실 되었던 것을 1996년에 복원한 것이다. [출처:안내문]
▼ 대동문
서울의 동북쪽 수유동과 우이동을 연결하는 관문이다. 문의 형식과 모습은 대남문이나 대성문과 같다. 그러나 홍예문은 이 문이 가장 크다. 하부의 홍예문은 통로로 사용되었으며 상부의 단층 문루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문루는 소실되었던 것을 1993년에 새로 복원하였는데 이 때 홍예문 상부의 여장도 함께 복원하였다. 문루 바깥쪽의 낮은 담장 형식으로 쌓은 여장은 아군의 몸을 숨기고 활이나 총을 쏠 수 있도록 설치한 군사시설이다.[안내문]
▼ 대동문을 지나면서 능선을 오르면 칼바위 능선과 연결이 되는데 이곳으로도 단 한번 산행을 한적이 없다.
수유동 방향으로 빨래골공원지킴터가 나온다는데 이쪽으로 산행할 기회가 앞으로도 좀처럼 쉽지 않을 것 같다.
▼ 보국문[補國門]
소동문 또는 동암문이라도 한다. 1993년에 보국문 상부의 여장을 복원하였고 부분적으로 수리하였다. 여기서 명칭을 살펴보면 현 시대에는 나라를 보호하고 지킨다는 의미의 호국(護國)이라는 용어를 많이 쓰는데 보 字가 保 字도 아닌 補 (도울 보)를 썼으니 나라를 지키는데 도움이 되는 문이란 뜻으로 그렇게 쓰였는가 보다.
▼ 보국문에서 대성문 방향으로 오르면서 뒤돌아 본 칼바위능선...
▼ 대성문 못미쳐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 주요봉들...
▼ 이곳에서 영봉을 비롯 오봉, 도봉산도 눈에 들어온다.
▼ 오프라인에서 처음으로 뵌 도솔님과 한컷!
▼ 대남문 쪽으로 이어진 성벽과 보현봉
▼ 보현봉을 렌즈로 당겨봤다. 비탐방지역이어서 감시카메라가 정상에 설치되어 있고 기암들이 마치 사람이 서 있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 대성문
형제봉 능선을 타고 서울의 북쪽 평창동과 정릉동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관문이다. 성문 하부는 홍예 모양으로 통로를 내고 성문들 달아 여닫을 수 있도록 했다.
상부 단층 문루는 우진각 지붕 형태인데 이는 지붕 네면 모두에서 불화살 공격을 막기 위한 것이다. 이 문루는 소실되었던 것을 1992년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안내문] 아래 사진은 2015년 7월 17일 촬영한 모습.
▼ 무슨 연고인지 완전히 해체하고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어떤 모습으로 세워질런지
시일이 좀 걸릴 듯 하다.
▼ 대남문
대남문은 북한산성의 가장 남쪽에 있는 성문으로, 산성이 축성된 1711년(숙종37년)에 지어졌다. 소남문이라고도 불린 대남문은 비봉 능선을 통해 도성의 탕춘대성과 연결되는 전략상 중요한 성문이다.
성문 하부는 홍예 모양으로 통로를 내고 성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도록 했다. 상부에는 군사를 지휘하고 성문을 지키기 위한 단층의 문루가 있다. 이 문루는 소실되었던 것을 1991년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안내문]
▼ 청수동암문[淸水洞暗門]
북한산의 나월봉과 문수봉 사이의 고갯마루에 위치해 있다. 탕춘대성과 성 안쪽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했는데 산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적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고갯마루나 능선에 설치했다.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성문 상부에 문루는 마련하지 않았다. 성문 양쪽은 장대석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 천장 부분은 장대석 여러 매를 걸쳐 만들었다. 이런 양식의 성문을 아치모양의 홍예식과 구분하여 평거식이라 부른다.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일반문의 빗장에 해당되는 장군목을 걸었던 방형 구명이 남아 있다.[안내문]
▼ 715봉에서 즐풍님의 멋진 포스팅 모습
▼ 바로 아래 나한봉으로 하산하면 나월봉, 증취봉, 용혈봉, 용출봉, 의상봉으로 이어지는 의상능선을 타고 성문 탐사에 나서게 된다.
▼ 북한산의 지휘부 전망이 좋다. 뒷쪽 가운데로 인수봉이 다른 봉우리와는달리 색깔이 좀 검은데 구름에 그부분만 살짝 가려져 이색적이다.
▼ 맑은 날씨이긴 하지만 역광인 상태에서는 습도가 많은 날씨 탓인지 시계가 별로 좋지 않다.
▼ 의상능선은 북한산을 조망하기 가장 좋고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능선임에는 이견이 없으리라 본다. 그런만큼 업, 다운도 심하고 다소 위험도 감수해야만 한다. 특히 동절기에 응달쪽에는 빙판으로 인해 낙상에 주의해야만 하는데 엊그제 내린 눈이 벌써 결빙되어 더딘 산행을 할 수 밖에 없었다.
▼ 일명 에스컬레이터 바위인데 뒷편이 결빙되었다는 지나온 산꾼의 말에 아랫쪽으로
향했는데 다람쥐같이 빠른 즐풍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 부왕동암문[扶旺洞暗門]
북한산의 나월봉과 증취봉 사이의 고갯마루에 위치해 있다. 성밖의 삼천사 쪽에서 성 안쪽의 중흥사에 이르는 길목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했다. 부왕동암문 아래에는 원각사(圓覺寺)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 원각사는 북한산성의 축조와 수비, 관리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승병이 주둔하였던 승영사찰이었는데 부왕동암문의 실질적인 방어와 수축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까닭에 부왕동암문은 원각문으로도 불린다.[안내문]
▼ 증취봉, 용혈봉, 용출봉, 맨 왼쪽 의상봉이 좀 더 가까이 조망된다.
▼ 지나온 나월봉, 나한봉을 배경으로 한컷...
▼ 어제에 비하면 너무 좋은 날씨로 걷는 내내 하늘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왼쪽으로 부터 오른쪽을 돌아 이곳까지 왔으니 컨디션이 완전 회복되면서 내게는 두발이 대세다.
▼ 증취봉에서 본 용혈봉과 용출봉...
▼ 뒤돌아 보니 나월봉, 나한봉, 715봉과 오른편으로 사모바위로 이어지는 비봉능선을 2년전 봄에 처음으로 밟으면서 식수가 모자라 갈증에 허덕여 진달래꽃을 따 먹으며 하산했던 생각이 떠오른다.
▼ 멀리 가로로 이어진 비봉능선
▼ 용혈봉에서 바라본 용출봉과 의상봉...용출봉을 넘어 안부로 내려가면 이제 능선상의 성문은 다 보게된 셈이다.
▼ 북한산에는 수도 없이 많은 바위명칭들이 있다. 그 만큼 기암괴석에 볼만한 바위들이 많다는 의미이다.
▼ 즐풍님이 용출봉을 오르는 어귀의 바위에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문귀를 소개한다.
「자명해인대 紫明海印帶」
자명은 산자수명(山紫水明), 즉 산은 자줏빛이며 물은 깨끗하다는 뜻으로, 경치가 아름다움을 이르는 말하며 해인은 해인삼매(海印三昧), 바다에 풍랑이 쉬면, 삼라만상이 모두 바닷물에 비치는 것 같이, 번뇌가 끊어진 부처님의 정심(定心) 가운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법이 명랑하게 나타나므로 해인정(海印定)이라 한다.
온갖 물듦이 깨끗이 사라진 진실된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가 일심법계이다. 즉, 마음의 바다에서 지혜의 눈으로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보지못하게 방해하는 것은 번뇌의 파도라 하였으니 그 원인은 어리석음이라는 바람 때문이다.
어리석음이라는 바람이 잦아들고 그로 인해 번뇌의 파도가 잠잠해지면 지혜의 바다(海)에 도장을 찍듯이(印) 한없는 시간, 끝없는 공간에 삼라만상 일체의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나타난다. 이것이 해인삼매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깨달음이라 했다. 아름다운 경치가 있고 깨달음을 얻는 곳이란 뜻이리라.
▼ 용출봉을 오르며 뒤돌아 본 용혈봉...암릉으로 된 험준해 보이는 지형이다.
▼ 아침에 오르던 반대편 원효봉이 제법 가까이 눈에 들어오고 산그림자가 벌써 지는 걸 보니 남은 산행거리가 멀지 않은 것 같다.
▼ 이제 능선상에 남은 마지막 성문인 가사당암문에 도착했다.
가사당암문((袈裟堂暗門)-가사당암문 아래에는 국녕사(國寧寺)가 자리잡고 있다. 거의 모든 문들이 방향이나 또는 지형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는데 이 문만은 승려들이 입는 옷인 가사(袈裟)를 썼다는 것이 이색적이다.
국녕사도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로 북한산성의 축조, 수비, 관리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승병이 주둔한 승영사찰이었는데 가사당암문의 수축과 방어를 담당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 까닭에 가사당암문은 국녕사문으로 불린다.[안내문 인용]
▼ 국녕사
1711년(숙종37년)에 북한산성을 축성한 뒤, 성내의 군사요충지에 사찰 13곳을 건립하여 산성의 수비와 성곽관리를 맡겼다. 이런 사찰을 승영사찰이라 하는데 이곳에 승군을 주둔시키고 무기를 보관하는 창고를 두어 병영의 역할을 겸하게 하였다. 국녕사는 북한산성의 축성과 함께 창건된 승영사찰의 하나로 당시엔 86칸 규모였다.
사찰의 위치로 미루어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의 성벽과 그 중간에 위치한 가사당암문의 수비와 관리를 맡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국녕사는 갑오경장으로 의승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존속했지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폐사되었다가 근래들어 새롭게 조성됐다.
문화재로는 절로 올라가는 계곡 우측에 한월당대선사라는 명문이 새겨진 조선 후기 양식의 사리탑이 있다.[안내문]
▼ 해가 짧으니 뉘엿 뉘엿 예정시간 보다 한시간이 뒤쳐졌다. 아마 즐풍님과 도솔님은 내 컨디션에 맞추느라 일부러 발걸음을 더디게 한 때문일 것이다. 애당초 중성문은 생략하기로 하고 의상봉으로 해서 하산하려 했었던 것인데 이왕이면 모두 돌아보자는 취지로 중성문으로 향한 것이다.
중성문
노적봉과 증취봉 사이의 협곡에 쌓은 중성에 설치된 성문이다. 대서문에서 이곳으로 이르는 지역은 지형이 비교적 평탄해 적의 공격에 취약한 구역이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이곳에 적의 공격을 이중으로 방어할 수 있는 차단성인 중성을 쌓았다.
중성 안쪽은 북한산성의 내성에 해당되는데 이 내성에 행궁, 중흥사, 상창등의 주요시설이 집중되어 있었다. 중성문의 수비를 담당했던 군부대는 대서문과 대남문의 수비를 맡았던 어영청의 유영이었다. 현재의 중성문은 석축기단인 육축부, 그 위에 올려진 문루, 무지개 모양의 출입구인 홍예문을 갖춘 전형적인 대문의 모습을 하고 있다.
홍예 양쪽에 문루의 배수시설인 누혈(漏穴)이 하나씩 설치돼 있다. 바깥쪽 홍예 안쪽에는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장군목을 걸쳤던 방형의 구멍이 남아있다. 규모는 대서문 보다 조금 작은 편이다. 문루는 1998년 복원했는데 1958년에 복원한 대서문보다 40년이 늦어 복원기술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중성문 옆의 암반에 폭 2.1m, 높이 1.8m, 규모의 작은 암문이 숨겨져 있다. 이 암문은 원래 이름이 없었으나 성 안에서 생긴 시신이 중성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이 문을 통해 나간다고 해 시구문(屍軀門)이라 불렀다. 한편, 중성문 바로 옆을 흐르는 계곡에는 수문이 설치돼 있었으나 현재에는 남아 있지 않다.[안내문]
▼ 중성문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시구문
▼ 중성문에는 중성문과 연결된 시구문과 더불어 계곡의 수문이 있었으니 두개의 문은 중성문에 가려 사실상 부각이 되지 않았지만 굳이 문의 숫자로 따진다면 14개가 아닌 16개의 문이 되는 셈이다.
▼ 하산하면서 올려다 본 원효봉 암릉...해가 뉘엿 넘어가니 붉은 빛을 띠고 있다.
▼ 대서문에 도착했다. 북한산탐방지원센터에서 북한산을 오르면 통상 거치게 되는 문이다.
대서문
북한산성의 정문으로 성문 16곳 중에서 가장 낮은 지점에 위치한다. 1712년(숙종38년) 숙종이 북한산성에 행차했을 때 이 대서문을 통해 성내로 들어갔다. 과거 성내에 마을이 있었을 당시엔 주민들이 대대로 이용했던 성문이기도 하다. 지금의 문루는 1958년에 복원한 것으로 북한산성 문루 중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
문루의 형식은 우진각지붕으로 문루의 일반적인 지붕 형태를 따르고 있다. 관영 건물이므로 지붕의 용마루와 추녀마루를 강회로 마감하였다. 누각에 북한산성 대서문 중수기가 걸려 있어 중수 내역을 전해 준다. 문루의 배수시설로 용머리 모양의 누혈(물이 흘러내리도록 구멍을 뚫은 돌)을 성문 앞뒤로 두었다.
성 밖을 바라보는 용은 입을 벌려 누혈의 구실을 제대로 하게 하였으나 성문 안쪽에 있는 용은 입을 다물고 있어 장식용으로 설치했음을 알 수 있다. 문루 정면에는 여장을 설치하였는데 한 장의 화강암으로 만든 점이 특징적이다.
북한산성 대문 6곳 모두에는 이런 독특한 형식의 여장이 올려져 있다. 이 대서문을 통과하여 중성문을 거쳐 대남문에 이르는 길은 북한산성의 주요 간선도로였는데 이 대문 3곳을 맡아서 수비, 관리하였던 군부대는 어영청 유영이었다. [안내문]
▼ 수문
북한산성에 설치한 2개의 수문 중 한 곳이다. 다른 수문은 중성지역 계곡에 있다. 수문은 성벽 하단에 문을 내어 성 안의 물을 외부로 흘려보내는 배수시설이다. 대개는 적의 침투에 대비한 철책 시설을 마련해 방어 기능까지 갖추고 있으며 수문의 규모가 작을 경우는 수구(水口)라 했다.
북한산성을 쌓을 때에 패장(牌將)이라는 기능별 감독관을 두었는데 성벽 축조를 담당한 축성 패장과 수문과 수구의 공사를 지휘한 수구 패장도 별도로 두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수문 축조에 고도의 건축 기술이 필요했다고 보인다.[안내문]
마지막 성문인 수문을 지나 좀 처럼 보기 힘든 석장승을 보며 오늘 하루일정을 마무리 하게 된다. 막연히 북한산을 오르며 늘 마주하는 산성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터여서 좀 찜찜했는데 어느 정도 익히고 나니 후련한 느낌이고 정말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특히 14성문만 알고 있었는데 중성문에 시구문과 수문터가 있어 모두 16개의 성문이 있음도 알게 된 것은 즐풍님의 안내와 설명이 없이는 그냥 지나칠 일들이다. 다시한번 발맞춰 리딩해 주신 즐풍님과 함께 답사한 도솔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함께 하고자 했으나 사정상 참석 못하신 솔담님도 다음 기회에 함께 멋진 산행을 기대해 본다. 홀로 산행하는 맛도 있지만 여럿이 함께 하면 그만큼 느낌을 공유하는 즐거움이 있기에 오늘의 보람이 있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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