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서면에 속해 있던 마을로 동장리(東場里)와 두산리 일부가 합쳐져서 동산리로 개칭되었다.
■ 동장리(東場里)
동장리에는 동역동(東域洞)과 구려동(舊閭洞), 죽산동(竹山洞), 금정동(金井洞)이 있었다.
⊙ 동역동(東域洞): 동녘에
동장리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동역동이라 하였는데 지금 구려마을에 포함되며 오늘날까지도 동녘에라고 전해지고 있다.
⊙ 구려동(舊閭洞): 구레
구려동 동쪽을 동녘에, 서쪽은 서녘에로 부르고 있다. 구려는 동장리에서 맨 먼저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구려라고 했고 또는 오래전 부터 백성의 집이 많이 있는 마을이라 해서 구려하고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구려가 와전되어 구레라 한다.
⊙ 죽산동(竹山洞): 죽산포, 테메
죽산동은 포구이다. 옛날에는 이 포구에 배가 많이 정박하여 배의 돛대가 마치 대나무 숲과 같다 하여 죽산동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죽산포라 부르고 있다. 또 임진왜란 때 이 마을 뒷산에 테를 두른 듯이 참호를 팠다는 유래에서 테메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 죽산
▼ 죽산포
⊙ 마산(馬山)
이 마을 뒷산 형상이 말같이 생겼다 하여 마산이라고 했으며 이곳에서 말을 키웠다 하여 마산이라고 불렀 두가지 설이 있다.
▼금정동(金井洞): 금정굴, 김정굴
전설에 의하면 이 마을에서 처음으로 금을 캐냈다 하여 금정동이라고 하였는데 금을 캐려면 우물보다 더 깊은 굴을 파야 하기에 금정굴이라고 명명한 것이 와전되어 김정굴로 전해지고 있다.
■ 두산리(頭山里)
두산리에는 작산동(鵲山洞), 두산동(頭山洞), 구정동(九井洞)이 있었는데 구정동(구정굴)은 난정리로 편입되었다.
⊙ 작산동(鵲山洞): 까치미, 모리(毛里)
까치미를 작산동 작산리라고 불렀다.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이곳 산세가 까치머리와 같다하여 작산동이라고 하였는데 작산은 까치산이라 해서 까치미로 와전되었다고 한다.또 이 마을에는 명성바지가 살았는데 이웃간에 화목하지 못하여 말다툼이 잦았다고 하여 타동 사람들에 의해 작산동 작산리라고 불린 것이 역시 까치미로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 모리(毛里)
작산동에 속하였는데 이 마을은 지형지세가 모(毛)자 형이라고 해서 모리라고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 모리 남쪽전경
▼ 모리 북쪽전경
▼ 두산동(頭山洞): 머르메
이 마을은 두산부락에서 자연부락 단위로는 가장 큰 마을이다. 두산(頭山)이라는 글자는 그대로 풀이하여 머리뫼라 한 것이 지금은 머르메로 전해지고 있다.
⊙ 돈지미(?地尾): 된지미
모리 동네 근방 동남쪽에 자리한 이곳 돈지미는 고려 말기(교동에 삼도통어사가 주재할 당시)에 오랑캐 침입이
있을 당시 이곳에 진을 치고 수비하던곳이라 해서 돈지미라 하였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된지미라 전해지고 있다.
⊙ 해창고(海倉庫): 해창골
동산리에 해창골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고려시대에 해군창고가 있었는데 이 창고에는 군수품 및 군량미를 두었다 한다. 해창고가 와전되어 해창골이라 전해지고 있다.
※ 동산리 팽나무는 교동에서는 희귀한 나무로 수령은 3~400년으로 추정된다.
[향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