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까지는 서면에 속해 있었으나 난곳리와 동장리 일부, 두산리 일부를 합쳐서 난정리라 이름하였다. 이 마을은 옛날에 우물안에서 난초꽃이 피었다는 기적이 있어 난정리라고 하였다는 전설이다. 이곳 지방 유지 방한관, 나세영, 방광근등이 1923년에 주선하여 육영의숙을 창설하여 훈육하였으나 세류에 부응하여 1929년에 부득이 폐교되었다.
■ 난곶리(蘭串里): 난구니
난곳리에는 후정동(後井洞), 간정동(間井東), 구석동(九石洞)이 있었다. 그리고 난곳리가 난구니로 와전된 것이다.
⊙ 후정동(後井洞): 뒤물이
난곳리 서쪽 맨 끝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에 큰 우물이 있어서 뒷마을 우물이라 하여 후정동이라 한 것을 뒤우물로 부르다가 뒷물이로 와전되어 전해지고 있다.
⊙ 간정동(間井東): 샛물이, 샛멀
이 마을은 구석동(큰멀)과 후정동(뒤물이)의 가운데 있는 마을로 역시 우물을 따서 간정동이라 하였는데 간정동을 새우물로 부르다가 샛물이로 와전된 것이 지금은 샛멀, 샘멀로 전해지고 있다 한다.
뒤물이와 샛멀은 샘이 좋아서 천수답이 없는 곳이다. 샘이 좋았기에 마을 이름에 우물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옛날에 장터가 있었다 하여 장골이라고도 했다.
또 이 마을의 물을 마시면 장생불사한다는 전설이 있었다. 이 마을의 물이 새로운 물이라 하여 샛물이 샘멀로 와전되었다는 설도 있다.
▼ 현재 뒤물이와 샛멀은 저수지 축조로 수몰되어 현재 큰멀에 새터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 구석동(九石洞): 큰멀
큰멀은 난구니(난곳리)에서 제일 큰 마을이라 하여 큰멀이라 불렀다고 전해지는데 구석동이라고 명칭한 유래는 고로(古老)들께서도 알 수 없다고 한다.
■ 동장리(東場里) 일부 월굴동(月窟洞): 얼구리
구정굴(구정동)에서 초승달이 지는 것을 보면 얼구리 뒷산으로 넘어가는데 마치 달이 굴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고하여 월굴동이라 하였는데 월굴이 와전되어 지금은 얼구리로 전해지고 있다.
■ 두산리 일부 구정동(九井洞): 구정굴
이 마을은 우물이 아홉개 있다고 하여 구정동이라 하였는데 구정동이 와전되어 구정굴로 전해지고 있으며 또 달과 연유가 있다 하여 월정부락이라고도 한다.
※ 육영의숙: 의숙은 1902년을 전후해서 생겼는데 난정리의 육영의숙은 방한관, 나세영, 방갑록, 방민근, 방정록이 설립하였으며, 의숙 선생님으로는 한광우, 황긍환, 박용우이며 교과목으로는 조선어, 한문, 수학은 물론 영어과목도 교육하였다고 한다. 교사 건물은 사가를 빌려서 근대식 교육을 하였는데 일제의 교육방침에 따라 수년을 경과하지 못하고 폐교되었다는 것이 이 고장 노인들의 증언이다.[향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