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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야기/교동약사·마을명칭

대룡1리(大龍一里)

 

 

▼ 위성으로 본 대룡1리

 

 

▼ 대룡1리 전경

 

 

 ▼ 화개산에서 바라본 대룡1리

 

 

 

 

 ⊙ 대아촌(大雅村): 대촌, 대춘

이 마을에서는 역마(驛馬)를 사육하였다 하여 대역촌이라 하였는데, 후에 대아촌으로 개칭한 것이 대촌으로 와전되었으나 지금은 대춘으로 전해지고 있다.이 역마는 공문서를 전달하는 공용으로 이용하였는데 이조 때는 진망산(현 읍내리의 남산)의 사신관을 왕복하는 역할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역비를 두어 임무를 수행토록 하였다 한다.

 

⊙ 제비동(연촌, 燕村) : 쥐비

천지마루를 넘어 제비동이 있는데 지형이 마치 제비집이 매달려 있는 것 같다는 데서 제비라 부르던 것이 쥐비로 와전되어 전해졌다.

 

 

⊙ 장골

옛날에는 이 마을에 시장이 있었는데 그곳에 큰 은행나무가 서 있어서 은행장터라고 불리었고 이것이 생략되어 장골이라 불리고 있다.

 

▼ 천자현(天字峴): 천지마루

토지의 지번을 설정할 때 이곳에서부터 시발하여 천자문의 순서로 지었다는 전설이다.일제가 침략하여(1904) 한일협약이 성립되면서 양지국을 설치하고 1905년부터 토지조사사업에 착수하면서 면동리장 입회 하에 답사하여 각 요소에 표적을 세우고 약도를 작성하여 개별 소유권을 사정하였다.

이는 개황도로서 경계지목 등이 있으나 전답의 표시는 속칭 마늘논, 빈대논 등으로 제작하여 일차 준비를 하였는데 이 개황도가 각 면에 비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분실되어 잔존한 면이 없는 것으로 추측된다.

1906년에는 토지 가옥증명 규정을 실시하여 매매, 저당, 교환, 증여법을 제정하였는데, 1910년에는 토지조사국(土地調査局)을 설치하고 세부측량에 착수하여 삼각측량, 도근측량을 실시하고 지적도를 작성하였다. 세부측량에 우리나라 종사원은 소정의 기술 습득을 필하고 일제 단도를 휴대하였다.

다음해에는 지방토지 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1912년에 발표된 토지조사령에 의하여 신고절차를 밟아 토지의 소재, 지목, 지번, 면적, 소유자를 등록케 하여 토지대장을 작성하였다 한다. [향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