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내리는 행정구역이 개편되기 이전 남면에 속하였다. 읍내리에 있는 옛 북문의
좌우편을 영마루라 하는데 영마루 남형기지를 인조 7년 (1629)에 읍지로 정하면서
부터 읍내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인조 7년에 수영을 월곳진( 현 읍내리)에 이설하면서
현을 부로 승격시키고 수군절도사 겸 도호부사를 두었다. 이로써 읍내리로 호칭하였다.
▼ 위성으로 본 읍내리
▼읍내리 전경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 본 읍내리
▼ 남산포
▼ 남산포에서 바라본 일출
▼ 삼도수군 통어영지(남산포 위치)
경기, 충청, 황해 삼도의 수군을 통찰하는 관청으로 통어사가 관제하고 경기수군 절도사와 겸직하여 종2품으로
보직하게 되었다. 현재 그 자취는 간곳이 없다.
▼ 남문
교동읍성 3문 중의 하나인 남문으로 유양루(瘐亮樓)라 불렀으며 1921년까지 문루가 존재하다가 당년의 폭풍우로
문루가 없어진 후 석재 건축물인 남문(아취형)만이 현존해 오던 것을 1982년 아취형 문의 손실 부분과 치첩을 보수하여 현재에 이른다.
▼ 교동부지
경기, 충청, 황해 3도를 관장하던 부 청사지로 조선시대의 관청이 있던 곳이다.
한때 교동부사는 수군방어사를 겸하게 하기도 했으며, 조선조 때 품게는 당상관 정3품으로 지금의 1급관리관과 같다고 볼 수 있고
지금은 그 옛 영화를 간직한 채 그 자취만 남아있다.
▼ 화개사
▼ 향교
고려 충렬왕 12년(1286)에 유학자 안향(安珦)이 원나라에 갔다가 공자(孔子)의 초상화를
가지고 돌아오면서 이곳에 모셨다고 전한다.
영조 17년(1741)에 지부 조호신이 화개산 북쪽 기슭에 있던 것을 남쪽 기슭으로 옮겼다.
안에는 공자의 신주와 우리나라의 유현들의 위폐를 모시는 대성전과 좌우에 선현들을
제사 지내는 동.서무를 두었고, 유생등이 배움을 익히고 닦는 명륜당과 동.서재, 제수용품을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내.외삼문이 있다. 현재 인천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다.
▼ 연산군 유배지(적거지) 추정지역
▼ 우물터
▼ 성터에서 바라본 강화인진나루
▼ 부근당
(扶芹堂)읍내리 251번지에 있으며 이조 10대 임금 연산군(1494~1506)이 폭정으로 중종반정이 일어나 임금은 교동으로 유배되어 사망할 때까지의 집터라고 한다. 확실치는 않지만 연산의 초상를 봉안하고 그 원혼을 위로하는 제행을 지내고 있었는데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또한 일설에는 연산군이 교동으로 귀양을 와서 살았던 곳은 고구리의 연산골이라고도 하는데 최근에는 강봉산(봉소리) 골짜기의 신곡동이라고 동리 거인전주사는 증언한다. 그러나 그 진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 상여바위: 응암서(鷹岩嶼), 매녀
남산포 앞바다에 있는 무인도로서 썰물 때는 멧산(山)자가 되는데
그 형국이 상여와 같아 상여바위라 했고 또 매가 날개를 펴고 있는 것 같다고 해서
매녀(응암서)라고도 부른다. 지금은 여기에 서해안 전선탑이 세워져 있다.
▼ 동진나루
⊙ 성내(城內): 성안
산성 안에 있는 부락이라 성내부락(성안)이라 하였다고 한다.
⊙ 절아래(사하부락)
화개산의 중턱에 절이 있고 이 절 아래 있는 마을이라는 데서 연유하였다. 현재 화개산에 있는 유일한 사찰이며 교동팔경의 하나로써 시인과 묵객들이 많이 왕래하였다. 이종훼(李鐘卉)의 시에 새벽종소리는 아취를 불러 일으킨다는 구절이 있다. 이 절은 고려때의 사찰로 1960년대에 소실하여 재건했고 여말학자 목은(牧隱)선생이 독서하였다고 전하여진다.
⊙ 영말레(영마루)
읍내리 북문터의 좌우편, 영(迎)은 근접한다는 뜻이고 말레는 마루(고갯마루)의 와전으로 보인다. 옛날 신임관수가 교동에 부임할 때에 이 마루터에서 육방관속의 풍악 등 각종 의례를 갖추어 영접하였다는데 연유가 있다고 보여진다.
⊙ 남산(진망산)
남산포가 있는 산을 말하는데 실은 중국에서 오는 사신을 기다려 맞이한던 곳, 즉 대빈창(待賓滄)이 대변창으로 변한 것이다. 대빈창은 강화군에서 교동과 주문, 볼음도에만 있다. 주문도, 볼음도 대빈창은 사신들의 중간 기착지로 여기서도 사신을 맞이했다는 데서 �여진 이름이다.
⊙ 비석거리(현존 비석은 남산포 앞길에서 향교 입구로 이전)
읍내리 현 교동양조장 앞에서부터 서쪽으로 수십여개의 비석이 늘어서 있던 곳을 이름하여 비석거리라고 전해져 왔다. 이 비석들은 쓰러지고 훼손되어 멸실될 우려가 있었다. 1970년대 새마을 사업이 한창일 때 교동의 지난날의 역사를 정립한다는 뜻에서 옛 교동의 관문이었던 남산포길 옆에다 이전 정립하였다.
전해지는 고로들의 말씀에 의하면 원님(통어사; 현감부사)이 이곳에 부임했다가 떠나게 되면 선정비를 세워주었다고 하는데, 기록에 의하면 고을마다 비석거리라는 지명이 없는 곳이 거의 없다. 그 고을을 거쳐간 원님들은 선정(善政), 악정(惡政)에 관계없이 선정 불망비를 세우게 되어 있고 이런 비석들이 많았기에 비석거리라고 한다.
선정비의 건립조건은
첫째: 수령 자신이 악정이나 실덕을 선절비로 은폐하기 위하여,
둘째: 자신의 선정를 조작하여 영달을 노리는 수단,
셋째: 주민들이 학정을 예방하는 수단으로,
넷째: 일부 추종자들이 이권을 노리고 아부하는 수단으로,
다섯째: 추종자들이 비석 건립비용을 핑계로 돈을 많이 거두어 착복하는 수단이라고 한다.
※원님이 교동에 왔다 간 수는 기록에 의하면 300여명이 넘는데 현존한 비석은 수십개에 불과하니 아마도 묻혀버리거나 타처에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님외에 개인의 의연비도 기록에는 있으나 현존비는 박계원의 비석 뿐이다. 하마비도 성내 4대문 밖에 있었다는데 현재는 동문 밖에 있던 것을 교동향교 입구에 옮겨 세웠다.
당시 관장(官長)들이 선정을 했다느 악정을 했든 교동으르 지나간 역사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니 잘 보존하여 교동의 역사를 길이 빛내는 것이 좋은 일이라 하겠다. 남산포 입구에 세웠던 비석을 향교 입구로 옮겨 세웠으니 옛날의 역사적 위치가 변동된다는 것이 아쉬운 일이기도 하다.
▼ 비석군(비석거리의 비석을 한데 모아 놓음)
⊙ 동진포
읍내리 성내부락 동쪽에 있는 나루터(동진나루터)를 동진포라고 한다.
⊙ 연당
옛날 이곳에 못을 파서 연을 심었고 물고기를 길러 관상으로 하였다고 한다.
⊙ 장거리
조선 중기에 이 거리에 장이 섰다고 하여 장거리라 전해지고 있다.
⊙ 사신당(使信堂)
읍내리 남산(진망산)밑에 있었고 사신당이라 하였으며, 바닷가의 바위에 층계돌을 징으로 찍어 만들었다고 한다. 전하여 오는 바에 때르면, 이곳은 고려시대에 송나라 사신들의 통행로가 되었으며 여기가 등선처였다는 것이다.
이조 중엽 이후로는 무기 수장고로 이용하였다. 이곳에서는 또한 사신들이 항해의 무사를 비는 제행을 행했다고 한다.
[향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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