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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및 기타 /사진추억록

[익산] 서동공원 & 왕궁리 오층석탑

2021년 10월 11일(월)

 

미륵사지 석탑에서 멀지 않은 서동공원을 답사했다.  2004년도에 조각공원이라는 이름이었는데 현재의 서동공원으로 거듭났다.

지붕없는 미술관이라 불릴만큼 조각품들도 많고 무엇보다 자연경관 역시 빼어나 한나절 산책하며 즐기기에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산책로를 따라 역사적으로 서동과 선화공주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의 설화를 엿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여 가볍게 한나절은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공원이다.

 

※ 소재지: 전북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526번지 (주차장)

 

▽ 마한박물관

마한박물관은 <마한의 성립배경>, <마한의 성립과 생활문화>, <마한에서 백제로의 변화>등의 테마로 익산의 마한문화를 소개하고 있다고 한다.  전시실 입구에 있는 ‘익산의 유적 분포도’에서는 익산이 금강과 만경강의 물길을 통해 새로운 문화와 사상을 받아들이기 쉽고, 한 나라의 도읍을 정하기에 적합한 곳이었음을 보여준다는데 코로나19로 인하여 폐쇄된 것이 아쉽다.

 

▽ 서동공원에 들어서면  고풍스런 무왕루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서동공원 입구쪽에서의 풍경)

 

서동과 선화공주의 설화

서동의 어머니가 처녀시절 익산 연못가에 집을 짓고 홀로 살던 중 그 연못의 용과 교통하여 서동을 낳았다는데 설화에 나오는 용은 어찌 보면 서동의 아버지인 셈이다.

서동이 비범하여 맨 처음 생각한 것은 가정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장에서 마를 팔던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아내를 맞이 하기 위하여 방법을 생각하게 된다.

오랜 시간 고민한 서동은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에 가서 거리의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며 동요를 퍼뜨렸는데 그 동요가 "서동요"이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해 두고

서동님을 밤에

몰래 안으러 간다네~♬"

아이들이 따라 부르던 서동요는 온 마을에 퍼졌고 그 내용이 신라의 왕의 귀에까지 전해지게 되어 화가 난 진평왕은 선화공주를 꾸짖고 먼 곳으로 귀향을 보내게 된다.

선화공주가 귀향길에 떠나려는 순간 서동은 공주에게 다가가 인사를 한 후 공주님을 모시겠다고 하고 그 동안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게 되는데 이에 선화공주는 서동과 함께 하기로 약속한다.

서동이 찾아낸 금덩어리를 지명법사님을 통하여 신라의 왕에게 보낸 후 진평왕의 신임을 얻어 선화공주와 결혼을 하게 된다.

서동의 소문은 백제에 전해지게 되고 마침 새로운 왕이 필요했던 백제 왕궁에서는 서동의 자질을 믿고 그를 새 왕으로 모시게 된다.

 

이와 같은 설화의 내용이 형상화된 모형과 함께 설명되어 있어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의 분위기에 자신도 모르게 젖어들게 된다.

 

▽ 금마저수지 쪽에서의 풍경

서동이 결국 백제 30대 왕으로 41년 동안 재위했지만, 아들 의자왕 시기에 이르자 애써 지켜 내던 백제는 끝내 멸망하고 말았다. 그는 백제 마지막 시기에 꺼져 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그런 탓에 백제의 왕들 가운데 가장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생동감 있는 천녀산화 像에 눈길이 간다. 天上의 仙女가 뿌리는 꽃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하고 있다는 모습인데 백제무왕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서동과 선화공주와의 전설이 있는 곳으로  연관된 금마저수지는 수변에 데크길이 놓여져 있어서 산책하기에 참 좋은 곳이다. 그러나  전부터 부여의 궁남지로 알고 있어 헷갈린다.

 『삼국사기』에 “백제 무왕 35년(634) 궁의 남쪽에 못을 파 20여리 밖에서 물을 끌어다가 채우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方丈仙山)을 상징한 것”이라는 기록이 있어 부여의 궁남지는 신라 선화공주와 결혼한 무왕의 서동요 전설이 깃든 곳으로  백제 무왕 때 만든 궁의 정원이었음을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터였다.

 

                                    ▽ 메타세콰이어 나무 아래의 벤취가 미륵산과 저수지를 배경으로  멋스럽다.

 

금마저수지를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는 서동정(薯童亭)도 좋은 쉼터로 어느 섹소폰연주자가 홀로 옛 노래로 한가락 불어 제끼니 더욱  옛 정취 및 가을 분위기가 살아나는 듯 하다.

 

  ▽ 수변 데크길을 따라 걸어 보고...

 

▽ 미륵산 아래에 자리한 금마저수지가 군생활하던 시절 훈련 장소로 황량하기만 하고 전혀  없었던 연꽃과 함께  멋진 풍경이다. 꽃이 필 무렵에 더욱 운치가 있을 듯 하다. 

 

스치면 인연, 스며들면 사랑... 이란 문귀가 가슴에 와 닿는다.

사랑...대수롭지 않은 안부 한마디에도 가슴 뭉클해 지는 것이라고 한 이외수 작가님의 글이 생각난다. 고귀하면서도 위대한 힘을 가진 것이 바로 사랑 아니겠는지...

 

다른 쪽에서 바라본 무왕루...

 

▽ 잔뜩 흐린 날씨에 빗방울이 떨어져서 더 이상 산책을 포기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로 한다.

 

서동공원에서 남쪽으로 약 3km지점에  있는 왕궁리 오층석탑을 답사 해봤다.

국보 제289호로 높이 약 8.5m의 석탑이다. 조선시대 말기에 간행된 익산읍지인『금마지(金馬誌)』에는 “왕궁탑은 폐허가 된 궁터 앞에 높이 10장으로 돌을 쌓은 것이다. 속전에는 마한시대에 만들었다고 한다.”고 전한다. 이전에는 흙으로 만든 받침을 둔 희귀한 석탑으로 알려졌지만, 1965년에 해체하여 보수하면서 원래 돌로 만든 받침을 갖추었음이 밝혀져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 소재지: 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657-11(주차장)

 

이 석탑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사리엄장구 유물들은 국보 제123호로 일괄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최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발굴과정에서 지금의 석탑에 앞서 목탑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 이 탑 밑부분에서 발견되어 다시금 주목을 끌고 있다.

 

 ▽ 기단부에 탱주(撑柱)가 2개 있는 사각형 석탑이며 옥신(屋身)과 옥개석은 모두 여러 개의 석재(石材)로 구성되었다. 옥신부는 4우주(四隅柱)와 탱주가 각출된 중간석 등 모두 8개로 되었고, 2층은 4면 1석으로 4개, 3층 이상은 2개의 석재로 조립하였다. 옥개석은 넓은 편이며 개석과 받침이 각각 다른 돌이고 받침은 3단씩이다. 개석은 1층부터 3층까지 8석, 4층과 5층은4석으로 구성되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 탑은 사찰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곳으로 이 석탑은 미륵사지 석탑을 본떠서 만든 백제계 석탑이다. 단층 기단, 얇고 넓은 지붕돌, 3단의 지붕돌 받침이 특징이다. 1965년부터 1966년가지 해체와 보수를 하였는데, 이때 1층 지붕돌 중앙과 기단에서 금강경판 19장, 금동제 사리함, 사리병등 사리장엄구(국보 제123호)가 발견되었다.

또한 석탑의 건물 기초는 가로 16.8m, 세로 12.7m 크기인데, 흙을 다져 메운 판축 기법을 사용한 점으로 보아 이 석탑은 본디 목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석탑 주변에서 '왕궁사', '관궁사', '대관관사', '대관궁사' 라는 글자가 새겨진 통일신라시대 기와가 발견되어 탑이 세워진 시기를 놓고 '백제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초기'등 여러 견해가 있다. [안내문]

 

▽ 왕궁리 유적지의 건물터는 대개 동서 방향의 석축들 앞에 있다. 건물터는 사찰이 세워지기 이전의 왕궁 건물터와 사찰 건물터에서 50여 곳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는 땅을 파서 다지고 그 위에 주춧돌을 놓은 토성 구조, 나무와 흙으로 단을 올린 토축 기단 구조, 건물 바닥을 지면에서 띄워서 지은 굴립주 건물 구조를 볼 수 있다. 이 세 유형의 건물터는 당시 건축 기술을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

 

전설에는 이곳에 한 노인이 아들과 딸을 데리고 살았는데 하루는 관상가가 아들과 딸 중 한 명만 데리고 살아야 큰 화를 면할 수 있다고 했다. 노인은 아들과 딸에게 먼저 탑을 쌓는 자식을 데리고 살겠다며 딸에게는 미륵사 터 석탑을, 아들에게는 이곳 왕궁리의 석탑을 쌓으라고 하였다. 하지만 아들이 게으름을 피워서 딸이 미륵사 터 석탑을 먼저 쌓았고, 딸을 데리고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위키백과]

 

▽ 이 석탑은 지붕돌이 얇고 넓어 빗물을 받는 낙수면이 평평한 점이나, 탑신부 1층의 지붕돌이 기단보다 넓은 점 등 백제석탑의 양식을 일부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언제 제작되었는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상태였으나 1965년 보수작업 때 기단의 구성양식과 기단 안에서 찾아낸 사리장치의 양식이 밝혀지면서 그 시기가 비교적 뚜렷이 밝혀졌다. 즉, 백제의 옛 영토 안에서 고려시대까지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양식에 신라탑의 형식이 일부 어우러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위키백과]

 

  ▽ 잠시 역사적 유물들을 돌아보면서 30년이 넘은 세월속의 추억을 더듬어 보았다. 개인이든 나라이든 세월이 흐르면 이렇게 추억과 역사로 남는다. 까마득히 흘러간 세월속에 수많은 희노애락이 묻혀 있을 것이다. 한쪽에서는 화려한 꽃이 피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단풍이 들고 잎을 떨구게 마련이다. 언젠가는 또 추억과 역사속에 묻혀질 오늘의 일들이 좋은 일들로만 가득차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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