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08월 03일(일)
강화군내에 19개코스의 나들길(실제20개코스)중 교동도에 2개코스는 9, 10코스로 9코스는 다을새길이고 10코스는 머르메 가는 길이다.
다을새는 교동도의 옛지명 중 하나인 달을신(達乙新 : 하늘에 닿을 새)의 소리음으로 표기한 것이며 머르메란 옛지명 두산동(頭山洞)의 머리뫼가
변형된 말이다.
회원님들의 사진으로 편집해 본 교동다을새길...
나크리 태풍으로 많은 비가 올것으로 예상했지만 이곳만은 비가 오지 않아 오히려 시원하게 트레킹을 마칠 수 있었다.
▼ 교동(喬桐): 동서로 약12km, 남북으로 8km, 둘레 37.5km, 면적47.2㎢ 우리나라에서 열네번째로 큰 섬.
행정구역은 13개의 법정리와 4개의 행정리를 포함 모두 17개리(里)로 1,400여 세대에 3,0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사면이 바다이면서도 주로 농업에 종사, 주요농산물은 쌀, 콩, 고추, 속노랑고구마이며 비닐하우스 농사에서 일부 특용작물들이 재배되고 있다.
▼ 교동대교-2008년 10월에 착공하여 2014년 07월 01일 정식 개통됨. 공사비 총890억원, 길이: 3.44km
▼ 월선포 선착장에서 바라본 교동대교
▼ 교동의 관문이었던 월선포 선착장. 교동대교가 2014년 06월 20일로 임시개통됨에 따라 정확히 06월 19일부로 카페리호 운항이 중단되었다.
대신 강화읍으로 부터 군내 18번 버스가 운행되고 이곳이 종점이다. 바다 건너 맞은편은 석모도의 상주산이다.
▼ 건너편 강화창후리 선착장과는 달리 이곳 월선포에는 버스종착역과 아울러 나들길 첫 들머리여서인지 매점을 비롯 좌판에서 판매하는 먹거리 및
해산물, 농작물이 있다.
▼ 함께 트레킹에 참여한 산악회 회원님들...
▼ 준비운동부터...
▼ 절터였던 안양사지(安養寺址)-교동에는 목은 이색의 수양처로 알려진 갈공사지(葛公寺址)-고구리를 비롯, 화양사지(華養寺址)-지석리,
법장사지(法杖寺址)=월정사지(月井寺址)-상룡리등 절터가 남아있다.
안양사는 화개사와 함께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될 만큼 유서깊은 절이었으나 현재는 이와같이 터만 남아있다.
전체의 규모는 동서로 약 21m, 남북 19m로 사찰지는 동쪽을 향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사지의 남쪽에는 1m정도의 토석 축대와 당시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샘터와 낮은 석축이 남아있다.
▼ 교동향교(喬桐鄕校)
고려 충렬왕 12년(1286)에 유학자 안향(安珦)이 원나라에 갔다가 공자(孔子)의 초상화를 가지고 돌아오면서 이곳에 모셨다고 전하며 이후 각 향교에
성현의 위패를 모시는 문묘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영조 17년(1741)에 지부 조호신이 화개산 북쪽 기슭에 있던 것을 남쪽 기슭으로 옮겼으며 교동향교를 우리나라 최초로 공자상을 봉안한
곳이라 하여 수묘(首廟)라 칭한다.
안에는 공자의 신주와 우리나라의 유현들의 위폐를 모시는 대성전과 좌우에 선현들을 제사 지내는 동.서무를 두었고, 유생등이
배움을 익히고 닦는 명륜당과 동.서재, 제수용품을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내.외삼문이 있다.
▼ 관리인의 안내를 받아 내부 곳곳을 살펴보고 역사의 현장을 체험해 본다.
▼ 대성전에 모셔진 공자상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된 석전제(釋奠祭)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 및 우리나라
역대 성현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추모하고 덕을 기리는 행사로서
매년 음력2월과 8월 초정일(初丁日)에 성균관을 비롯한 전국234개 향교에서 치러진다.
교동에서는 음력2월은 농번기로 인해 년1회 양력 9월28일로 정해 행사를 치룬다.
▼ 화개사(華蓋寺)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341년(고려충혜왕 2년)에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이 독서하던 곳이었으며 그해 교동에 극심한 흉년이
들어 가을에 교동을 떠났다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원 건물은 1840년경 화재로 소실되어 예전 화개암지의 자리에 화개사를 세웠으나 또 다시 1967년 화재로 인하여 이듬해인 1968년 중건하였다.
경내에는 유물로 1기의 부도(浮圖)가 있으나 그 유래는 알 수 없으며 이 사찰에 전해오던 소장품들은 1967년 화재당시 소실되었고 고려시대
불상 2구가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었다고 한다.
▼ 화개산 봉수대(華蓋山 烽燧臺)
봉수대는 멀리 바라보기 좋은 높은 산봉우리에 설치하여 밤에는 횃불[烽]을 피워, 낮에는 연기[燧]를 올려 외적이 침입하거나 난리가 일어났을 때에
나라의 위급한 소식을 중앙에 전하는 통신수단이었다.
화개산 봉수는 화개산 정상에서 서쪽 능선에 이어져 있는 연봉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 아래로는 교동읍성과 남산봉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강화부지에는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었던 봉수라 전해지며 "남쪽으로는 본부의 망산(덕산봉)에 응하고 동쪽으로는 하음산에 응한다. 봉수군은
46명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봉수는 장방형의 석단이 남아 있는데 가로 460cm, 세로 720cm이고 석단의 잔존 높이는 120cm이다.
교동내에는 진망산(남산)봉수대와 수정산봉수대가 있으며 진망산(남산)봉수는 장봉, 볼음도, 말도와 연결되어 교동의 통어영에 보고하여 서해안의
상황을 신속하게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수정산봉수는 서쪽으로는 연백군 간월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같은 군의 각산에 응한다
고 기록되어 있는데 연백군의 간월산에서 연락을 받아 북으로 각산에 연락을 취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봉수군은 45명이라 전하고 있다.
김포 백석산, 통진 수안성산, 강화 진강산, 교동 화개산 봉수까지 이르렀다가 다시 강화 하음산, 강화 송악산, 통진 남산, 김포 북성산을 거쳐 서울
남산의 1~5봉 중 제 5봉(烽)으로 연결된다. (동국여지지)
▼ 화개산성(華蓋山城)에 대한 재 조명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백제 진사왕 때 20일간의 격전을 치뤘던 전략적 요충지인 관미성으로 추정. 모 방송 드라마 방영이후 세간의 주목을 받는
곳으로 내외성으로 축조되었으며 등산로를 따라 볼 수 있다.
축조시기에 관하여는 알려진 기록은 없으며 증개축에 관한 기사만 전해지는데 조선실록에 1418년(세종1년) 경기팔방이 강화 교동산성 및
광주 일장성(현 남한산성)을 수축 할 것을 청한다는 기록이 있은바 적어도 세종이전에 화개산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때 축조되어 전해지는 것 같으나 "국조문헌"에는 1555년(명종10년)에 왜란을 당하여 이 산성을 증축하고 성안에 군량창고을 두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교동현편에는 화개산성은 돌로 쌓았는데 성안에 연못이 하나, 샘이 하나, 군창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1591년(선조 24년)에 외성을 개축하여 현재의 고읍리 부근에 고읍성을 축조하였으며 지금은 내성만이 남아 있다. 그 후 1737년(영조13년)에
이르러 개축하였는데 산성의 남쪽은 산 정상부의 절벽을 자연성채(자연장애물)로 이용하고 북쪽은 화개산의 북록에 걸쳐진 전체적으로 남북이
세장하게 축조되었다. 전체 길이 2,168m, ,중 내성둘레 1,013m, 외성둘레 1155m로 북문, 동문, 서문의 외삼문과 내성과 외성을 연결하는
내성문, 내성 서쪽의 서암문 등이 조사된 바 있다.
내성 서벽의 8부 능선쯤 되는 위치에 높이가 80cm,폭이 4m정도 되는 문지(門址)가 남아 있으며 화개약수가 내성의 우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하며
해상에서 적을 격파하지 못했을 경우를 대비한 육상 예비진지의 역할도 겸하였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2000년 강화군과 육군박물관의 공동조사에서 백자편과 분청사기편이 발견되었다.
▼ 화개산 정상 표지목
▼ 맞은편 맨왼쪽의 석모도로 부터 우측으로 기장섬, 미법도, 서검도, 저멀리 왼편부터 주문도(아차도와 붙어보임), 볼음도, 맨우측 말도...
▼ 시정거리가 좋아 예성강 줄기와 개성의 송악산도 관측되었다.
▼ 화개약수터
▼ 한증막
소나무 가지등을 이용하여 불을 지피고 재를 꺼낸다음 달궈진 열로 찜질을 했던 어른 7~8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다.
뜨거운 열로 땀을 냄으로써 신경성 통증을 줄이고 미약해진 물질대사를 왕성하게 하는 일종의 치료를 위한 시설이다.
둘레 15m, 직경 4.5m, 높이 4.5m로 현재 전국적으로 밝혀진 조선시대 한증막 중 최대 규모로 알려져 있다.
실제 1970년대까지도 동네분들이 사용했으며 이곳 고구리뿐만 아니라 상룡리, 난정리,봉소리, 서한리등 계곡물이 흐르는 곳에 위치해 있었으며
현재 상룡리 한증막은 자취만 남아 있는 상태다.
이곳 한증막은 2008년 복원하였으나 원형의 외부 모습과는 변형된 상태이나 내부의 모습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한증막은
세종 4년(1422)에 최초로 축조되어 어의로 하여금 보살피게 하는 등 의료요법으로도 사용되어 왔다.
▼ 연산군유배지 추정지에서...
위리안치에 대해 아시는 분?
절도안치, 본향안치란?
연산군 위리안치지역의 정확한 위치가 문헌에 기록된 바 없어 교동내에는
연산군의 위리안치지역을 3곳으로 추정, 봉소리, 고구리영산부락,
읍내리 읍성내로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 교동면사무소(주민자치센터)
▼ 교동의 학교는 3개의 초등학교와 1개의중,고등학교가 있다.
이곳은 1906년에 개교한 교동초등학교로 2006년에 10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올해로 108주년이 되는 유서깊은 학교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태어난 년도와 졸업횟수가 같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57년생이면 57회 졸업생이 된다.
▼ 대룡리 시장
휴전이후 별로 달라진것이 없는 영화세트장 보다 더 세트장 답다는 건물들...모방송 1박2일 프로그램으로 유명세를 타게되었다.
6.25전쟁 전에는 현 북한지역인 연백군과 개풍군이 모두 38선 이남으로 교동북쪽의 말탄포, 선월포, 율두포, 북진나루, 낙두포, 호두포등으로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었으나 갑자기 전시가 되면서 연백지방의 피난민이 교동으로 넘어 오게 되고 대룡리에 피난민 연락소가 생기면서 각리에
있던 피난민들이 전시상황을 알기 위해 대룡리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이때 부터 차츰 먹거리를 비롯한 장터가 생기기 시작하였고 다시 돌아가려던 고향길이 막히게 되자 포장을 둘러치고 장사를 시작하던 피난민들이
정착을 하면서 점포 규모도 커지고 업종도 다양해지면서 자연스레 점차 시장으로 형성되었다.
대부분의 토지소유자는 교동의 본토 사람이거나 종중의 토지이고 건축물은 토지를 임대한 피난민의 소유가 많아 증개축에 어려움과 더불어 증개축
필요성이 없었으므로 현재까지 그 당시의 모습으로 유지되어 온 이유라 할 수 있다.
▼ 현재도 이와같이 제비가 집을 짓고 새끼를 키우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 1960~70년대 극장이 있었던 곳이 주점인 클럽으로 변했다.
▼ 논농사로 일관하던 평야가 이젠 제법 비닐하우스 농사가 눈에 많이 뜨인다.
▼ 남산포
교동에는 10개의 포구(浦口)와 1개의 나루(북진나루)가 있었으나 6.25전쟁이후 현재는 4개의 포구(죽산포, 남산포, 동진포, 월선포)만 이용되고 있다.
그 중 남산포는 남산(옛지명 진망산)이 위치한 포구로서 이곳에 선창이 있었고 선창의 이름이 대변창이었다.
남산 능선에는 사신관지와 사신당이 있었으므로 중국으로 오가던 사신들이 주로 이용한 포구라 추정할 수 있는데 현재는 사신당만 남아있다.
조선초기 동진포에서 남산포 일대가 세조 때까지 경기우도수영(좌도수영은 화성 남양)이었으나 1629년(인조7년)에 남양(현 수원,화성)의 화량진을
교동으로 옮기고 통합사령부격인 경기수영을 설치하였으며 교동현에서 교동부로 승격되었다.
이후 4년 뒤인 1633년(인조11년)에는 삼도수군통어영을 설치, 경기도는 물론 황해도와 충청도의 수군을 관장하게 하였다.
이 때 교동의 군사상 관할구역은 삼산면, 서도면, 옹진군, 장봉도, 덕적도에 이르고 황해도와 충청도까지 전함을 배치하고 군기를 축적하여 서, 남해를
방어토록 하였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여객선이 인천연안부두로 부터 강화 선수, 외포리를 거쳐 이곳 남산포로 7시간이 소요, 운항되었던 교동의 관문이었다.
후에 강화창후리로부터 월선포선착장으로 운항된 카페리호로 인하여 점차 쇠퇴되기 시작, 현재는 몇몇 어부들의 선착장으로 쓰인다.
▼ 전함을 정박했던 계류석 한개가 그당시 역사의 흔적을 대변해 주고 있다.
▼교동읍성(喬桐邑城)
▼ 교동읍성(喬桐邑城)-조선 인조7년(1629), 교동에 경기수영(京畿水營)을 설치할 때 돌로 쌓은 읍성이다. 둘레 430m, 높이 6m
규모로 세개의 문을 내고 문루를 세웠는데 동문은 통삼루, 남문은 유량루, 북문은 공북루라 하였다. 영조 29년(1753)
여장을 고쳐 쌓았고 고종 21년(1884)에는 남문을 다시 고쳤다. 동문과 북문이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며 남문은
1921년 폭풍우로 무너져 홍예문만 남아있다.
▼ 교동도호부지(喬桐都護府址)
조선 인조7년(1629년)에 남양의 화량진을 옮겨 경기수영이 읍내리에 설치되고 교동현이 교동부로 승격된 후 설치된 것이다. 삼도(경기,황해,충청)
수구통어영을 관장하였으며 안해루(현종9년 1667년)의 석주가 2개 남아 있고, 객사터와 북문과 서문, 동문의 흔적과 성곽의 일부가 남아 있다.
▼ 고려의 21대 왕 희종, 조선 10대 왕 연산군, 15대 왕 광해군, 25대 왕 철종과 익평군, 임창군,영선군, 낙선군, 숭선군, 경안군, 능창대군, 임해군,
안평대군등이 교동으로 유배되었다.
특히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1506년 9월 2일 교동으로 유배되어 그해 11월 6일 사망시까지 2개월 4일 동안 교동에 유배되어 위리안치되었으나
연산군 유배와 관련 교동 어느 곳인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고 현재 교동에서는 이곳 읍내리, 봉소리(신골), 고구리(영산골)등
세곳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강화군에서는 1968년 읍내리에 "연산군 적거지" 안내판을 설치하였으며, 교동면에서는 2008년 고구리에 "연산군 유배지"
안내 입석을 설치하였다.
연산군이 역질로 교동에서 죽자 강화로 옮겨 왕자의 예를 갖춰 장례를 치렀으나 1512년(중종7년)12월 부인 신씨가 상소하여 묘를 강화에서 능성구씨
(綾城 具氏)의 선영이며 연산군의 사위와 딸의 무덤이 있는 양주군 해등면 원당리(현 도봉구 방학동 산77번지)로 이장하기를 청하여, 이듬해인
1513년 2월 이장하고 양주군의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현재 읍내리에는 부근당(扶芹堂)이라는 당집을 지어 섣달에 당굿을 지내고 연산군의 원혼을 위로했다고 전해지며 부근당안에는 부부로 보이는 탱화가
걸려있다.
▼ 유배 당시에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터
▼ 부근당(扶芹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