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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야기/교동약사·마을명칭

고구리(古龜里)

 

 

 

본래의 교동군은 동서남북면 및 송가면이 있었으나 1911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2개면으로

되었을 당시 동면 고읍리(古邑里)와 구산리(龜山里)를 합쳐서 고구리로 명칭하였다.

 

 

 ▼ 고구2리 전경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 본 고구리 전경

 

 ▼ 고구2리

 

▼ 고구2리의 생결마을(송결)

 

 

 ▼ 고구2리의 영산마을

 

▼ 고구1리 전경

 

고구1리의 독구개 마을

 

 

 

▼ 고구저수지 전경

 

 

■ 구산리에는 양지동(陽地洞)과 고양동(皐陽洞), 송계동(松溪洞), 영산동(靈山洞)이 있다. 양지동에는

양지편 기름재, 고랑멀이 있고 고양동은 가장골을 말하며 영산동은 그대로 영산을 말한다. 영산을 연산골이라고도 한다.

 

⊙ 구산리

구산리는 뒷산 형국이 거북이 형상이라 해서 구산리(구사니)라 전해지고 있다.

 

⊙ 양지동

이 동네에는 양지바르다고 하는 양지편이 있고, 깊숙이 삼태안 모양을로 되어 있다고 하여 고랑멀이 있으며,

또한 기름채가 있는데, 기름채란 기름짜는 연장으로 양지동에서는 이 마을에만 기름채가 있었기에 기름채라 하였다.

 

 ▼ 양지멀

 

▼ 고랑멀

 

▼ 기름채

 

▼ 기름채에서 바라본 고구리 저수지

 

⊙ 고양동

고양동은 가장골이라고도 하는데 거북과 같은 산(구산) 가장자리에 위치하였다고 하여 가장골이라 전해진다.

 

 

 

⊙ 영산동(연산곡 燕山谷; 연산골)

이조 10대 임금 연산군이 중종 반정이 일어나 교동으로 유배되어 이곳에서 잠깐 있었다 하여 연산골이라 한 것이

그 유래라고 하고 하고 영산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렇지 않다는 설도 있으나 별다른 유래는 없다.  

 

 ▼송계동

송계동에는 송계, 상현, 중현, 하현 마을이 있었는데 송계는 소나무가 무성하고 마을 앞에는 시내가 흘러간다 하여

송계(생결)라 전해지고 상현, 중현, 하현 마을 중 지금 남아 있는 마을은 중현이다. 이 중현은 중머루라 전해지고 있다.

상현, 하현은 빈터만 남아있다.

 

※ 송계덕산(松溪德山)의 전설

원래 송계는 송계덕산이라 하였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이상한 습관이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나무로 시렁을 매어

 그 위에 시체를 한동안 얹어 놓았다고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송계덕산이라 하였는데 이조말에 송계라고 고쳐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한절악

여기는 송계부락(생결)의 일부분으로 한광우 씨의 현재 집터인 이곳에 한절이라는 절이 있었는데 주지의 성이

한씨여서 한절이라 하였다고 하며, 지금은 이 부근이 한절악이라 전해지고 있다.

 

■ 고읍리는 인조 7년(1629)의 교동읍이었는데 성내동(城內洞)과 석현동(石峴洞)이 있었고 인조 7년 후에는

읍을 읍내리로 옮기었다.

 

⊙ 성내동

성내동은 지금 현재의 곰리(고읍리)를 말하고 고려 때 임금의 피신처로써 읍으로 되어 있었기에

고읍리라고 전해지며 지금까지도 토성의 자취가 남아있다.

 

 

 

토성의 흔적

 

 

▼ 석현동

석현동은 돌이 많은 지대라 하여 석현(石峴) 돌고개라 하였는데 돌고개가 와전되어 독구개로 전해지고 있다.

 

⊙ 옥터

교동의 읍이었던 고읍에는 그 시대의 죄수를 가두었던 형옥(감옥)의 자취가 남아 있는데 꺼져가는 사적의 복원을 기다리고 있다.

 

⊙ 병풍바위

고구리 마을 산에 있는 바위가 병풍을 둘러친 것처럼 보인다소 하여 병풍바위로 전해지고 있다.

 

⊙ 향교골

고구리(중현) 중머루위(남쪽)에 향교가 있었다(고려 때로 추정함) 하여 지금도 향교골로 전해지고 있다.

 

⊙ 국수마루

고읍리 옥터 우측으로 능선이 있는데 여기를 국수마루라고 한다. 읍지대로 도살장도 있고 옥(감옥)도 있고 하여

이 능선 편에는 음식점(국수집)이 있었다고 하며 그런 연유로 국수마루라고 전해졌다는 고로들의 말씀이 있다.

또 국수마루 우측으로는 지금도 성터(화개산성)가 완연하다.

 

⊙ 도화동(桃花洞)

옥터 위로는 도화동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복숭아 나무가 많았다 하여 도화동이라고 전해지는데 이는 근래의 전설이라고 한다.

 

⊙ 도수장내(屠獸場內)와 옥터

고읍리 옥터 좌측의 냇골은 도수장내라고 하는데 고읍리가 읍지대이며 옥(감옥)도 있고 하여 이 냇가를 도살장으로 이용하였기에

도수장내라 하였다는 옛 노인들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 추장천

옛날에 빨래를 많이 하던 냇골이라 하여 추장천이라고 한다.

 

※ 구사니(구산리) 느티나무는 수령 4~500년으로 추정되며 잎이 무성해서 여름철이면 정자로 이용되고 있다.

※ 생결(송결) 은행나무는 수령 4~500년으로 추정되며 은행이 무수히 열린다.

※ 영산(영산동) 느티나무는 수령 4~00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향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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