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1658년(효종9년)에 설치한 강화도 해안수비 진지의 하나이다.
1679년(숙종5년)에 강화도의 국방시설을 확장할 때 화도돈대, 오두돈대, 광성돈대를 함께 축조하여 이에 소속시켰다.
신미양요 때(1871년) 미국 군대와 사투를 벌인 격전의 현장으로 이 때 전사한 어재연 장군을 기리는 전적비와 350여명의
순국 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신미순의총이 있다.
▽ 광성돈대(廣城墩臺)
광성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된 3개 돈대 중 하나로서 숙종5년(1679년)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의 승군(僧軍) 8,000명과
어영군(御營軍) 4,300명이 40일만에 완공하였다 한다. 1977년 포좌(砲座) 4개소와 포3문(門)이 복원 설치되었다.
대포는 홍이포(紅夷砲)라고도 하며 사정거리 700m로서 포알은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날아가나 포알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하다. 병자호란에서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소포(小砲)는 사정거리 300m로서 포알은 대포와 같다. 대포는 조준이 안되나 소포는 조준이 된다.
작은 것은 불랑기라 하며 프랑스군이 쓰던것이라 한다.
▽ 불랑기(佛狼機)- 불랑기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널리 사용된 화승포로서 포 1문에 5개에서 9개의 자포(子砲)를 결합하여 연속사격할 수 있는 발달된 화기이다.
소포(小砲)-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장전식화포(砲口裝塡式火砲)로 사정거리는 300m이며 우리나라
재래식 화포 중 가장 발달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대포(大砲)-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장잔식화포로 사정거리는 700m이며 조선 영조 때 부터 주조하여
사용하였다.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포탄은 날아가나 포탄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하다.
▽쌍충비
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 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1823-1871) 외 59명의 순절비이다. 1기는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로 비의 규모는 높이 168cm, 너비 62cm, 두께 25cm의 양면비로 1873년에 건립한 것이다.
다른 1기는 어재연과 어재순(1826-1871년)순절비인데 폭이 높이 177cm, 너비 58cm, 두께26.5cm의 양면비로 역시 1873년에 건립되었다. 고종 때 부터 제사를 지내왔으며 1970년 부터는 어재연의 후손들이 제사를 올려 충절의 유업을 추모하고 있다.
▽ 손돌목
강화도는 한강 입구에 있는 섬이다. 그러나 여느 섬과는 달리 육지와의 사이를 흐르는 물길(염하)이 빠르고, 또한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심해서 여간 숙련되지 않은 뱃사공은 이 물길을 함부로 건너지 못한다.
인조 5년(1627), 후금(뒷날의 청)이 쳐들어 왔다. 임금이 서둘러 강화도 피난길로 나섰을 때 손돌이 길 안내를 맡았다.
그러나 강화도로 가는 뱃길은 험했다. 급한 물살과 그에 따라 뒤집힐 것 같은 배는 임금을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손돌은 태연하게 노를 저어 점점 더 험한 물살의 가운데로 배를 몰아갔다. 임금은 속으로 "이 뱃사공이 나를 죽이기 위해 배를 이곳으로 모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손돌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손돌은 죽기전에 말했다. "제가 띄우는 바가지가 흘러가는 곳으로 배를 몰고 가십시오. 그러면 안전하게 강화도로에 도착할 것입니다." 손돌은 죽었고 바가지가 흘러가는 곳으로 따라가던 배는 강화도에 도착했다. 임금이 강화도에 발을 내딛자,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물길은 더욱 험해졌다.
임금이 천천히 말했다. "으음, 내가 손돌을 의심하였구나. 나의 잘못이다. 여봐라, 손돌의 시신을 잘 거두어 후하게 장사를 지내도록 하라."
지금 광성보에서 마주 보이는 김포의 덕포진(대곶면 신안리)에 손돌의 무덤이 있다. 사람들은 이 물길을 손돌의 목을 벤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 부른다.
손돌이 죽은 음력 10월20일에는 큰 바람이 분다고 한다. 이를 손돌의 한숨, 손돌바람, 손돌추위라 한다.
▽ 진지에 핀 으름덩굴 꽃
▽ 순절 용사들은 어재연 장군의 지휘아래 꽃다운 젊은 나이로 명령을 받고 이곳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치뤘을 것이다. 그리고 무참히 쓰러졌을 것이다. 변변치 않은 무기를 가지고 침략군과 맞서 싸운 그 용맹함으로 실제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 자신 스스로들도 이 전투에서 승전했다고 보질 않는다. 병사들은 이 총안구를 통해 적을 감시했을 것이며 밖의 세상을 보았을 것이다. 우리네 인생도 늘 그렇다. 내안에서 밖을 보는 세상...어떻게 볼 것인가! 얽히고 설키는 내외적인 문제에 봉착할 때 마다 나 한사람의 푸르름은 정말 고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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