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30일(일)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우리의 일상이 달라지면서 처음에 느끼던 불편함도 이젠 별로 못 느낄 정도로 익숙해진 요즘, 백신이 도입 되면서 2차 감염예방 주사까지 맞은 사람이 주변에 있는 것을 보면 코로나로 부터 곧 해방이 될 것 같은 분위기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인데 코로나19로 인해 아주 작은 일에 감사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자유롭게 사람을 만나고 음식도 먹고 여행도 다니며 즐거움을 찾는 일은 당연한 일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이젠 마스크 벗고 마음껏 공기를 마시는 것도 감사한 일이니 말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유행이 된 말이 "누죽걸산" "나죽집산"이다. 참 기가 막히게 지어낸 유행어다.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 "나가면 죽고 집에 있으면 산다." 는 말의 준말이다. 누죽걸산은 한자로 와사보생(臥死步生)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걸으려면 실내의 운동기구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밖에 나가서 걸어야 하므로 나가면 죽는다는 말은 사람과의 만남도 조심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란 얘기일 텐데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집에만 머무르지 말고 부지런히 걸어야 하기에 집에 있으면 산다는 말은 또 이치에 맞지 않다.
동의보감에도 건강과 장수에 관하여 약보(藥補)보다 먹는 식보(食補)가 낫고 식보(食補)보다는 걷는 행보(行步)가 낫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코로나19 발생이래 지금까지 예전의 그대로 망설임 없이 방역수칙을 준수하며 꾸준히 주말이면 원정산행을 해 온 것은 스스로 잘했다는 생각이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 집안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 너무 아쉽다는 생각에 옆지기와 아직 한번도 올라보지 못한 강화도 정족산을 오르기로 하고 느즈막이 짐을 꾸린다.
∥트레킹 정보∥
♣ 소재지: 인천 강화군 서도면 볼음도리
♣ 트래킹코스: 전등사 주차장-남문-전등사-동문-북문-서문-남문-동문-남문-주차장
♣ 거리: 약 4.2km(시작-13:20, 종료-15:20)
∥정족산성(삼랑성) 개요∥
원래 정족산성은 원래 이름은 삼랑성으로 단군의 세 아들이 정족산에 쌓았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정족산성은 조그마한 산성으로 별로 유명하지 않다. 오히려 산성 안에 있는 전등사가 강화도 내에서 유명했다.
흥선대원군이 1866년 병인박해로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을 처형하자, 프랑스 정부는 화가 나서 해군 특전대 약 6백여 명을 조선에 파병하였다. 프랑스군은 문수산성에서 한성근이 이끄는 조선군과 맞서 사상자 27명을 내는 등 피해를 입지만 결국 강화도에 상륙했다. 양헌수는 휘하 군사 120명을 이끌고 덕진진을 통해 유일하게 함락되지 않은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수성장(守城將)이 되었다. 프랑스군은 이를 알고 병력 60여 명을 보내었다. 양헌수는 사거리가 짧은 조총의 단점과 프랑스와의 전력차를 인정하고, 총을 잘 쏘는 포수들을 입대시키고 프랑스군이 성에 가까히 접근하면 쏘는 근접사격을 도입했다.
마침내 프랑스군이 성 가까이에 접근한 순간 근접사격을 가하자,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에 부상자 35명이 생기는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당시 프랑스 병력들은 놀러 가는 기분으로 음식을 잔뜩 싣고 방심한 채로 정족산성에 접근하다가 당한 것. 프랑스 장교들은 빡이 쳐서 정족산성을 다시 공격하자고 건의하지만, 지휘관 로즈 제독은 정족산성을 함락하기에는 병력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강화도에서 철군하라고 명했다.
정족산성 안에 전등사(傳燈寺)라는 사찰이 있는데, 당시에는 전등사에 정족산 사고가 있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다. 정족산을 지켜냄으로써 사고도 함께 지킬 수 있었다. 정족산성 전투의 공으로 양헌수는 승진하여 나중에는 공조판서까지 되었다. 조정은 이 전투를 기리기 위해 1873년 정족산성 입구에 승전비를 세웠는데, 훗날 인천시 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되었다. [나무위키]
▼ 전등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주차요금을 2,000원 받고 매표소에서 입장료는 4,000원을 지불해야 한다. 사실 절을 보려 온 것이 아니고 정족산을 오르려고 한 것인데 어쩔 수 없이 산행을 하기 위해서는 6,000원을 지불해야 하니 좀 그렇다.
무료 산행 방법은 승용차나 42번 버스를 타고 길상면 온수리에 있는 길상119안전센터에서 북문으로 올라와 산행을 하면 매표소와는 별개이므로 삼랑성 전체를 돌아보고 갈 수 있다.
▼ 이왕 매표소에서 표를 끊었으니 전등사를 한번 둘러보고 산행을 하기로 한다. 아니, 산행이라기 보다는 트레킹 정도로 생각하면 좋겠다. 남문인 종해루(宗海樓)를 통과하여 전등사로 향한다.
▼ 수령이 700년이 되었다는 은행나무로 2001년 강화군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어제는 볼음도에서 800년이 된 은행나무를 봤으니 그리 놀랍지도 않다.
▼ 전등사
▼ 전등사 대웅보전
대웅보전은 절의 중심 건물로,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 약사여래불을 모신 곳이다. 대웅은 법화경에서 위대한 영웅을 뜻하는 말로, 석가모니불을 가리킨다. 보살은 석가모니불과 같지만 중생교화를 중심으로 말한 것이다.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은 화려한 내부 장식과 능숙한 조각솜씨가 돋보이는 조선 중기 사찰 건축물이다.
조선 광해군 13년(1621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지붕 처마 무게를 받치는 구조인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짜여 있는 다포양식 건물이다. 건물 네 모서리 추녀 밑에는 벌거벗은 사람의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전설에 따르면 절을 짓던 목수의 재물을 가로챈 주막 여인의 모습이라고 한다.
나쁜 짓을 꾸짖어 하루 세 번 부처님 말씀을 들으며 죄를 씻고, 깨달음을 얻어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라는 의미로 추녀 밑에 새겨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고 한다. 천장은 용, 극락조, 연꽃 등으로 하려하게 장식하였으며 부처를 모신 불단과 불상 머리 위의 닫집 장식이 화려하다. [안내문]
▼ 측면에서 본 대웅보전
▼ 약사전과 명부전
▼ 강화 정족산사고지(江華 鼎足山史庫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인 장사각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던 선원보각이 있던 곳이다. 조선은 초기부터 조선왕조실록을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 등 네 곳에 보관하였다. 임진왜란 때 유일본으로 남은 전주사고본이 묘향산사고로 옮겼다 다시 마니산사고를 거쳐 현종 1년(1660년) 이곳으로 옮기고, 오른편에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함께 지었다.
1931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에 이 사고의 사진이 수록된 것으로 보아 이후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실록은 1910년 국권침탈 이후 서울로 옮겨졌고,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보존, 관리하고 있다. 1998년 두 건물을 복원 후 옛 현판 '장사각'과 '선원보각'을 다시 달았다. [안내문]
▼ 전등사 주변에 색감 좋은 돌나물이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 초롱꽃도 폈고...
▼ 낮달맞이꽃도 이쁘게 폈다.
▼ 양헌수 승전비
동문쪽에 위치한 양헌수 승전비로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됐다.
화강암으로 건립된 비의 총 높이는 181cm, 비신(碑身)의 높이는 163cm, 폭은 60cm, 두께는 27cm이며 단층 1칸의 비각 내에 안치되어 있다. 비 앞면에는 ‘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巡撫千摠梁公憲洙勝戰碑)’라고 음각되어 있고, 비 뒷면에는 병인양요 양헌수 장군의 공적이 수록되어 있다.
▼ 동문으로 이동하여 왼쪽 등로인 산성을 따라 산행하게 된다.
▼ 산성 안쪽으로 다소 가파른 계단을 따라 5분 정도 오르면 첫 번째 조망처가 나온다.
▼ 성 밖에는 멋들어진 기와집들이 즐비한데 스님들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수행처나 기거하는 곳인 것 같다.
▼ 첫 조망처에서 북쪽을 바라보니 왼쪽 멀리 석모도의 해명산과 진강산, 덕정산이 보인다.
▼ 가운데 김포의 문수산도 보이고...
▼ 길상면 온수리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 동쪽의 풍경으로 가운데 김포와 강화도를 연결하는 초지대교가 보인다.
▼ 당겨 본 초지대교...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와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를 잇는 다리로 1996년 인천광역시에서 착공하여 2001년 8월 완공한 다리이다. 길이 720m에 왕복 4차선이며 섬과 내륙을 잇는 연륙교다.
▼ 남쪽으로는 길상산이 바라다 보인다.
▼ 진행 방향의 삼랑성으로 잘 축조된 모습이다.
▼ 뒤돌아 본 삼랑성
▼ 성벽 위의 잘 닦여진 등로가 이어지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오월의 푸르름을 만끽해 보는 날이다.
▼ 30여분도 안되어 정족산 정상이 보인다. 산성위의 잔디를 밟는 촉감도 참 좋다.
▼ 다시 한번 북쪽 방향을 조망해 본다. 중앙수로에서 왼쪽은 화도면, 오른쪽은 양도면에 속한다.
▼ 진강산과 가운데 덕정산 그 뒤로 살짝 혈구산과 오른쪽 맨 뒤로 고려산이 고개를 내밀었다. 길정저수지가 그 아래 평야의 농사 용수를 감당하고 있다.
▼ 더 가까워 진 정족산 정상... 산성 안부쪽에 북문이 자리하고 있다.
▼ 남문, 동문, 서문과 달리 북문은 북한산성에서 많이 보아 온 암문(暗門: 성곽에 문루를 일부러 세우지 않고 뚫은 문을 말하며, 주로 일반인이나 적들이 알지 못하게 후미진 곳이나 깊숙한 곳에 만들어진다. 주로 전시에 적이 모르도록 비밀스럽게 물자를 이송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과 흡사하다. 이곳이 북문 자리인지는 도상에서 표시되어 있을 뿐 안내문이 없어 확인이 안된다.
▼ 북문을 나서면 온수리시장이라는 안내표식이 있어 도상에서 보면 길상119안전센터로 가는 길이다.
▼ 정족산 정상을 오르기 전의 경사면은 훼손이 되어서 된비알이 되고 말았다. 정비가 시급한 상태다.
▼ 아쉬움에 다시 한번 살펴 본 화도면과 양도면 사이의 평야와 진강산, 모내기는 모두 마친 시기이다. 2015년도에 강화군은 가뭄으로 저수지, 수로마다 바닥이 드러나 거북 등 처럼 갈라질 지경이었으니 모를 못낸 곳도 많았다. 오죽하면 그 심각성으로 국민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리고 민심을 달래보기 위해 대통령이 직접 방문하여 소방차의 호수로 논에 물을 대는 모습까지 보였을까... 어쨋든 그 후로 한강물을 끌어 들여 교동도를 포함하여 이젠 그런 가뭄은 없게 됐다.
▼ 진강산과 길정저수지는 양도면, 오른편은 길상면에 속한다.
▼ 온수리 지역과 멀리 김포 문수산...
▼ 정족산 정상(삼랑성 정상)
▼ 길상면 선두리 마을과 오른쪽 앞은 초피산, 뒷쪽은 마니산 모습
▼ 진행 방향의 산성과 멀리 길상산
▼ 다시 한번 담아 본 오른쪽의 앞 삼각 형태의 초피산과 뒷편 마니산의 모습
▼ 뒤돌아 본 정족산 정상
▼ 황토흙길인 산성로
▼ 서문은 문이 있어 닫혀있다. 성 밖으로 등로가 없어 안전상 설치를 해 놓은 듯 하다. 이곳에서 바로 전등사로 가는 길도 있다.
▼ 성벽 여장(女墻: 낮은 담으로 총구와 타구가 일정한 간격으로 만들어져 있는 구조물)을 잘 복원해 놨다.
▼ 다시 뒤돌아 본 정족산 정상
▼ 동쪽으로 접어 들어 진행 방향의 풍경
▼ 길상산이 점점 가까워 온다. 이곳 삼랑성을 한바퀴 돌고 저곳 길상산을 산행하는 분들도 있다. 총 거리는 대략 11km 내외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 잘 복원된 산성...파란 잔디와 함께 아름다운 풍경이다.
▼ 이와 같은 등로는 보기만 해도 힐링이 된다.
▼ 저 아래쪽 소나무숲에서 간식을 먹으며 잠시 쉬기로 한다.
▼ 길상산쪽을 바라보니 곤돌라가 쉼없이 움직인다.
아시아 최대 규모의 루지 리조트 ‘강화 씨사이드 리조트’가 2018년 6월 28일 정식 개장됐다고 하는데...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 일원에 조성된 강화 씨사이드 리조트는 2개 라인, 각 1.8km에 달하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루지’뿐만 아니라, 최고의 전망을 즐길 수 있는 관광곤돌라와 회전전망대, 다채로운 세계음식을 맛볼 수 있는 푸드코트, 울창한 숲이 어우러진 산책로 등 강화도에 선보이는 첫 번째 가족 테마 리조트로서 특히, 메가 루지는 익사이팅 존, 360도 회전코스 등 차별화된 코스로 쉴 틈 없이 짜릿함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 초지대교쪽을 다시 한번 조망해 보고...
▼ 염하강 넘어 멀리 계양산과 천마산도 당겨 보고...
▼ 영종대교 넘어로 청라국제 신도시의 풍경도 담아 봤다.
▼ 급경사가 진 내리막에 접어들고...
▼ 이쯤 오니 저 멀리 능선의 성벽은 동문에서 트레킹을 시작한 곳이다. 오른쪽 능선에서 왼쪽으로 접어들면 동문으로 내려가는 지점이다. 소나무 풍경이 너무 멋져 보여 렌즈로 당겨 본다.
▼ 한 폭의 그림 같은 소나무 풍경
▼ 마침내 남문에 도착, 원점 회귀했다. 그러나 멋진 소나무를 보기 위해 멀지 않으니 동문까지 가 보기로 한다.
▼ 멀리서 사진에 담았던 소나무지만 가까이 가보니 멀리서 보는 풍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 동문으로 이동...
▼ 동문에서 남문이 살짝 보인다. 샛길로 바로 이동하면서 트레킹을 마치기로 한다. 전등사는 초교 6학년 수학여행 때 한번 와 보고 그동안 서너번 온 것이 고작이고 삼랑성을 돌아 본 것은 처음이다.
과거와 달리 삼랑성을 잘 복원하고 등로를 잘 가꿔 놓은 덕분에 주변을 조망하며 특히 깊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이곳을 답사하며 공부도 해 본 의미있는 하루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