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장릉
2020년 2월 23일(일)
완택산 산행을 마치고 남은 시간은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장릉을 관람하고 귀경하는 일정이어서 2,000원의 입장료를 별도로 지불하고 장릉을 둘러보기로 한다.
비운의 단종에 대한 이야기는 학창 시절부터 역사공부를 하면서 알고 있는 사실이고 묘를 찾아보는 것은 난생 처음이다. 실제 유배지였던 청령포는 그 근방까지만 갔다가 나룻배 타는 시간을 기다리기 싫어 그냥 다른 곳을 향했던 기억밖에 없어 이번이 답사의 좋은 기회다.
우리나라 과거 역사로부터 지금까지 권력자들이 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를 가거나 감옥에 갇힌 일들은 현재에도 진행형이다. 외세의 침입에 의해 민초는 수도 없이 희생당하고 내부적으로는 서로 헐뜯고 칼부림 나는 싸움질로 국력을 약화시킨 일이 한두 번이랴! 그러니 한 많은 민족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한민족의 피 속에는 그러한 DNA가 흐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린 나이에 숙부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생각하면서 언제나 민족 모두가 통합의 정신을 갖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갈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보게 되는 시간이다.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의 능으로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청령포에 유배되었다가 17세에 죽임을 당하여, 그 주검이 동강에 버려졌다.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데 영월호장 엄흥도가 그 시신을 거두어 지금의 장릉에 모셨으며, 이후 숙종때인 1698년에 이르러 단종이 왕으로 복위되고 왕릉으로 정비하면서 묘호를 단종, 능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장릉 주위의 소나무는 모두 능을 향하여 절을 하듯 굽어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경이로움을 자아내게 한다. 매년 4월 마지막 주말에 단종문화제가 성대하게 거행되며, 특히 조선시대 국장 재현행사는 1천명이 넘는 인원과 49종 275식의 도구가 동원되어 장엄하게 재현된다. 2009년 6월 30일 장릉을 포함한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장릉은 비운의 왕으로 알려진 제6대 단종(1441~1457)의 능이다. 조선 왕릉은 현재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하고 대부분 도성인 서울을 중심으로 반경 4~40킬로미터에 조영되었다. 장릉은 유일하게 강원도 영월군에 있다. 이곳은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오지로 면적은 약 353만 7,000제곱미터나 된다.
단종은 문종과 현덕왕후 권 씨의 아들로, 태어난 다음 날 어머니를 여의었다. 10세 때인 1450년 아버지인 문종의 즉위로 왕세자로 책봉되었는데, 문종이 왕이 된 지 2년 3개월 만에 사망하는 바람에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 한국사 전체에서 가장 비극적인 왕이 된다.[다음 백과]
객관적 조건으로만 보면 왕위 계승자로서 단종의 조건은 완벽했다. 문종도 적장자였고, 단종도 적장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가장 비참한 국왕이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다.
문제는 단종이 너무 어린 나이로 왕이 된 데다 수양대군(36세)과 안평대군(35세)을 중심으로 한 숙부들이 인생에서 가장 정력적인 시점에 와 있었다는 점이다.
더구나 그들은 뛰어난 능력과 커다란 야심을 갖고 있었다. 단종의 신하들은 대부분 세종 대의 인재들이었다. 삼정승은 세종의 고명을 받은 황보인, 남지, 김종서였고, 그 아래의 실무진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신숙주 등 대부분 집현전 학사 출신이었다.
▼ 아래 건물은 왼쪽이 단종비각, 오른쪽 큰 건물이 제향시제를 올리는 정자각, 뒷쪽 작은 건물이 수라를 짓는 수라간, 가운데 제정(祭井)으로 사용한 우물로 영천(靈泉)이라 한다.
즉위한 지 1년 반 만에 계유정난이 일어나 단종은 숙부인 세조에게 양위하고 상왕이 되었다. 그러다 단종의 최후가 찾아온 이유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세종의 여섯째 아들, 세조의 동생)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사사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단종은 노산군에서 다시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면서 사건이 종결되는 듯했으나 세조의 신하들은 벌떼같이 일어나 단종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면 차후에도 사육신, 금성대군과 같은 복위 사건이 계속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금부도사 왕방연은 사약을 가지고 단종이 있는 영월 청령포로 갔다.
하지만 왕방연은 차마 말을 하지 못했고 교생 복득이 단종의 뒤에서 활시위로 목을 졸라 죽였다. 그러나 실록에 따르면 왕방연이 영월에 도착하자 단종은 목을 매 자진(自盡)했다고 되어 있다.
사후 처리도 비참해 야사에 따르면 시신이 청령포 물속에 떠 있는 것을 평소부터 충성심이 강했던 영월호장 엄홍도가 몰래 수습해 장릉 자리에 안장했다고 한다.
그가 장사 지내려 할 때 주위 사람들은 후환이 두렵다며 말렸다. 하지만 그는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겠다"라며 단종의 시신을 홀로 밤에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엄홍도의 충절은 높이 인정되어 그의 자손에게 벼슬자리는 물론 추후에 공조참판이라는 벼슬도 내려졌다.
이런 예를 근거로 영월 사람들은 영월이 '충절의 고장'이라는 데 대단한 긍지를 갖고 있다. 또한 장릉은 향토 문화재가 거행되는 유일한 왕릉이다.
장릉 주변에는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 죽음을 당한 사육신과 대의에 따라 절개를 지킨 4명의 충신을 포함해 10충신의 위패를 모신 창절사가 있고, 영흥리 일대에는 단종이 사망하자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단종의 뒤를 따른 여섯 시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민충사와 영모전 등이 있다.
정순왕후 송 씨는 송현수의 딸이며 단종보다 한 살 위로 1454년 가례를 올렸다. 1455년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자 수강궁으로 옮겨 살았는데, 16세에 세상을 뜬 남편보다 64년을 더 살다가 중종 16년(1521) 세상을 떠났고, 현재 경기도 남양주의 사릉에 있다. 사릉은 그동안 비공개였는데 2013년 1월부터 공개하고 있다.
▼ 장릉(단종의 묘)
▼ 장판옥(藏版屋)
이 건물은 정조 15년(1791)에 건립한 것으로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忠臣位)32인, 조사위(朝士位)186인, 환자군노(宦者軍奴- 宦者 : 내시, 軍奴 : 군대에서 사무를 보던 관아의 종)44인, 여인위(女人位)6인을 합하여 268인의 위패(位牌)를 모셔 놓은 곳이다.
▼ 홍살문과 전각들...안쪽에 제향시제를 지내는 정자각이 있다.
홍살문에서 제향시제를 지내는 곳으로 이르는 참도는 곧게 나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곳은 "ㄴ"자로 꺾여 있다. 두길이 나란히 나 있는데 왼쪽길은 신이 걷는 신도이고 오른쪽 길은 임금이 걷는 어도이다.
▼ 수복실(守僕室)
능(陵)과 경내(境內)를 관리하는 능지기가 기거하던 곳으로 숙종25년(1699)에 정자각(丁子閣)과 함께 세운 건물
▼ 단종비각(端宗碑閣)
영조9년(1733)에 어명으로 단종대왕릉비(端宗大王陵碑)와 비각(碑閣)이 건립되었다. 비석 앞면에는 조선국단종대왕장릉(朝鮮國端宗大王莊陵)이라는 글이 음각되었으며, 뒷면에는 단종대왕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 비석 앞면
▼ 단종의 제향시제를 지내는 정자각...바로 윗쪽에 왕릉이 위치해 있다.
▼ 정자각(丁字閣)
숙종25년(1699)에 건립하였으며, 단종대왕 제향(祭享)시제(時祭)를 올리는 곳으로, 집의 모양이 정(丁)자 모양으로 건립된 제전(祭殿)이므로 정자각(丁字閣) 또는 배위청(拜位廳)이라 한다.[안내문]
▼ 안내문에는 두 곳이 잘못 표기되어 있다. 하나는 "제향(祭享)시 제"로 표기해 놓은 것을 "제향시 제물" 로 표기해야 옳을 것이며 또 하나는 배위청을 절 배(拜)가 아닌 물리칠 배(排)를 표기 해 놨으니 뜻이 무례하기 짝이 없는 한자를 표기해 놓아 후대에 이런 몰상식한 불충이 또한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세계 문화유산인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는 영월 장릉이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수정 해 놓아야 할 일이다. 전문 해설가가 남녀 두 명이나 배치되어 있으면서도 이러한 일을 간과해 왔으니 좀 더 꼼꼼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월군청 문화관리팀에 전화를 해 놨으니 수정여부를 기다려 보자.
▼ 정자각 내부...뒷쪽 문으로 묘가 보이게 건립 되었을 것이다.
▼ 반대쪽에서 본 정자각
▼ 수라간(水剌間)
수라(水剌)는 원래 몽고어로서 탕미(湯味)를 뜻하며, 수라를 짓는 주방(廚房)을 의미한다. 어주(御廚)-임금의 진지를 짓는 부엌
▼ 영천(靈泉)
정조15년(1791)에 어명으로 영월부사 박기정(朴基正)이 수축하여 한식때 제정(祭井)으로 사용하였다. 보통때에는 조금씩 샘물이 솟았으나 매년 한식때 제향을 지낼 때에는 물이 많이 용출(湧出)하였다. 우물의 깊이는 1.5m정도이며 하부는 화강석 돌담으로 둥글게 쌓여있고 상부는 정방향이다.
▼ 우물안 모습
▼ 장릉 전각의 전경
▼ 370년 수령의 느릅나무는 높이가 22m, 둘레가 3.9m로 2003. 11.15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마치 느티나무와 같이 생긴 모습으로 느티나무가 이렇게 큰 것도 처음 본다.
▼ 정자각 쪽에서 장릉 매표소 방향으로 담은 풍경
▼ 엄흥도(嚴興道) 정여각(旌閭閣)
이 비각은 엄흥도의 충절(忠節)을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영조2년(1726)에 세운 것이다. 충신 엄흥도가 영월호장(寧越戶長)으로 있을 때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 유배되어 관풍헌(觀風軒)에서 1457년 10월 24일 조정에서 내려진 사약을 받고 승하하여 그 옥체가 강물에 버려지자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암장하여 충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순조33년(1883)에 공조판서(工曹判書)로 추증되었고 고종13년(1876)에 충의공(忠毅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 비각의 내용과 같다.
▼ 재실(齋室)
이 건물의 처음 건립연대는 숙종25년(1699)이고, 1932년에 중건하였다. 이곳에는 능을 지키는 참봉 1인과 수호군 9인이 기거하였으며 매년 단종 제향을 지낼 때 이곳에서 제물을 준비하고 제기를 비롯한 각종 사용 기구를 보관해 오던 곳이다. 1997년~1998년 재실지붕 및 배수로를 보수정비하였다.
▼ 재실의 내부 모습
▼ 장릉 매표소 방향에서 정자각 쪽으로 바라본 재실 풍경
▼ 단종의 일대기와 그 당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