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1
▼ 흠경각과 함원전
흠경각은 농업발전을 위해 천체의 운행을 이해하고 시간을 정밀하게 측정하고자 했던 왕의 고민과 노력이 깃들어 있는 건물이다.
세종은 1438년에 흠경각 건립을 명하고 여기에 옥루기륜(玉漏機輪), 앙부일구(仰釜日구)등의 시간 측정기구와 천문 관측기구인 간의(簡儀)를 만들어 설치했다.
경복궁 내전 깊숙이 위치해 주로 불사(佛事)를 행하던 함원전도 세종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왕조는 유교 국가인데도 세종 등 여러 왕과 왕비가 불교에 심취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다. 몇 차례의 소실을 거쳐 1888년(고종25)에 복구되었으나
경복궁의 다른 내전들과 마찬가지로 1917년의 창덕궁 대화재 이후 일제가 창덕궁 재건을 위해 뜯어 갔다.
현재의 건물들은 1995년에 복원한 것이다.
▽ 흠경각
▼ 자경원 일원: 흥선대원군이 선물한 대비전
헌종(24대 임금)의 어머니인 신정왕후 조씨는 고종(26대)의 즉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조 대비의 거처를 궐 안에서
가장 화려하고 세심하게 만들어 은혜에 보답했다. '자경'이란 이름은 정조가 즉위하면서 혜경궁 홍씨를 위해 창경궁에 자경당을 지은 데서 비롯되었다.
그 의미는 왕이 어머니나 할머니 등 왕실의 안어른께 경사가 있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두 차례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88년에 재건하여 경복궁 침전의 전각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옛 건물이다.
▼ 동궁(東宮)일원: 왕세자의 거처
왕세자는 떠오르는 해처럼 왕위를 이을 사람이기에 내전의 동쪽에 거처를 배치하고 이를 동궁이라 불렀다. 서쪽의 자선당(資善堂)은 세자와 세자빈이 거처하던
내전이고, 동쪽의 비현각(丕顯閣)은 공부를 하며 정무도 보던 외전에 해당한다.
남쪽의 춘방 터에는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시강원이, 계방 터에는 의전과 경호를 담당하던 익위사가 있었으며. 그 주위에는 부속 관청들이 있었다.
조선 초에는 동궁이 궁궐 밖에 있었으며, 궐 안에 동궁전으로 자선당을 짓기 시작한 것은 1427년(세종9)이다. 몇 차례 소실을 거친 뒤 임진왜란 때 완전 소실되어
1867년에 재건된다.
일제가 조선물산 공진회 개최를 앞두고 박람회를 연다는 핑계로 1914년에 동궁 일대를 완전히 철거했다. 이 건물들은 1999년에 복원한 것이다.
▼ 함화당과 집경당: 후궁과 궁녀들을 위한 공간
교태전 북쪽인 아미산 너머에는 흥복전 일원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 일대는 후궁과 궁녀들을 위한 후궁 영역이다.
침전으로 쓰였던 수많은 전각과 복잡한 행각들은 거의 사라지고, 현재는 함화당과 집경당만이 남아있다.
이나마도 일제가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운영하면서 사무실로 쓰기 위해 헐지 않아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흥복전은 빈궁으로, 중궁전인 교태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으되 격을 한 단계 낮추어 지었다.
그런데 조 대비가 이곳 흥복전에서 승하한 것으로 보아 대비전의 용도로도 쓰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함화당과 집경당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고종이 건청궁에 머물 당시 여기서 외국 사신을 접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향원정과 건청궁: 고종을 위해 지은 궁안의 궁
함화당과 집경당 북쪽 후원 영역에는 향원지라는 네모난 연못이 조성돼 있고, 그 가운데 향원정이 있다. 경회루가 웅장하고 남성적이라면 향원정은
아늑하고 여성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원래는 북쪽 건청궁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파괴된 후 지금처럼 남쪽으로 놓았다.
향원정은 세조 때 세운 취로정 터에 건청궁을 지으면서 조성한 것이다. 향원정 북쪽, 경복궁 가장 깊숙한 뒤쪽에 건청궁이 자리하고 있다.
고종은 1873년(고종 10)에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 체제를 구축하면서 정치적 자립의 일환으로 건청궁을 세웠다.
건청궁은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 왕의 처소인 장안당, 서재인 관문각으로 이루어졌으며,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시해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1909년에 헐린 후 1939년에는 이 자리에 미술관이 들어섰고, 해방 이후 민속박물관으로 쓰이다가 헐렸다. 2007년에 관문각을 제외한 전각들을 복원했다.
▽ 향원정
▼ 집옥재 일원: 청풍(淸風)과 조선풍의 조화
1876년 경복궁에 큰 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1885년에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와 주로 건청궁에 기거했다.
이때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이었던 집옥재와 협길당(協吉堂) 등을 1891년 건청궁 서편으로 옮겨 와 서재와 외국 사신 접견소로 사용했다.
집옥재는 양옆 벽을 벽돌로 쌓아 만든 청나라풍 건물로, 밖에서 보면 단층으로 보이나 내부는 중2층으로 되어 있다.
팔우정(八隅亭)은 팔각 누각으로 기둥 상부에 청나라풍의 화려한 낙양각을 달았다.
반면 협길당은 고유한 조선식 건물로 온돌방을 두어 휴식 장소로 사용했다.
세 건물은 복도를 통해 연결되며, 각각의 특색을 지니면서도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 집옥재
▼ 태원전 일원: 왕위 정통성 확보를 위한 고종의 노력
왕자 출신이 아니었던 고종은 부친 흥선대원군과 함께 왕권 승계의 정통성 시비에 대응해야 했다. 그 일환으로 태원전을 지어 역대 임금의 초상인 어진(御眞)을
모심으로써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 1868년(고종 5)에 건립된 것을 추정되는 태원전에는 태조의 어진을 모셨다. 이후에는 황후의 시신을 모시는 빈전(殯殿)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문경전(文慶殿0은 위패를 모신 혼전(魂殿)으로 건립했다.
주변에 공묵재, 영사재 등 의례용 건물도 들어서 신성한 일곽을 이루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다. 2006년에 현재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 경회루: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건축 미학의 절정
경회루는 왕이 신하들과 규모가 큰 연회를 주재하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한 곳이다. 연못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과 궁궐의 장엄한 경관을
감상하는 왕실 정원으로 꾸몄다.
창건 당시 작은 누각이었던 경회루는 1412년(태종 12)에 연못을 크게 확장하고 누각도 큰 규모로 새로 지었다. 임진왜란으로 불타 돌기둥만 남은 것을
1867년에 재건하였다.
경회루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중층이며, 넓이 931㎡의 대규모 목조건물이다. 1층은 48개의 높은 돌기둥들만 세우고 비웠으며, 2층에 마루를 깔아 연회장으로
이용했다.
마룻바닥은 3칸 중앙 부분이 가장 좊고, 그 다음 12칸은 한 뼘 정도 낮고, 바깥쪽 20칸은 다시 한 뼘쯤 더 낮은데, 중앙으로 갈수록 높은 품계의 관료들이 앉았다.
경회루는 주역의 원리에 기초하여 지었다는 옛 기록이 있다.
이에 따르면 중앙의 3칸은 천지인을, 12칸은 1년 열두 달을, 바깥에 있는 24개의 기둥은 24절기를 의미한다. 높낮이 경계 부분에는 분합문(위쪽으로 들어 여는 문)
창호가 달려 있어 창호를 내리면 각각 닫힌 방이 된다. 추녀마루에는 우리나라 건물 가운데 가장 많은 11개의 잡상(지붕 위 네 귀에 여러 가지 신상을 새겨 넣은
장식 기와)이 있다. 재건 당시에 청동으로 만든 두 마리 용을 연못에 넣어 물과 불을 다스리게 했다 하며, 1997년 준설공사 과정에서 출토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 현재 청와대
▼ 국립민속박물관
▽ 국립민속박물관 옆에 있는 세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