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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전국

수원 화성씨티투어

2014년 04월 19일(토)

 

※ 투어코스: 해우재(화장실문화전시관)→화성행궁→화홍문→방화수류정→동장대(연무대)→수원 화성박물관

 

      ▼ 화장실문화공원

 

   

▼ 화성행궁행궁터는 2007년 4월 1일 사적 제478호로 지정되었다. 한국의 행궁(왕이 궁궐을 벗어나 머무는 곳)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웠던 곳으로, 수원 화성(華城:사적 3)의 부속물이다. 1796년(조선 정조 20)에 화성을 축성한 후

팔달산(八達山) 동쪽 기슭에 576칸 규모로 건립하였으며, 그 전까지는 1789년(정조 13) 수원읍치를 화산에서

팔달산으로 옮기면서 관아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효성이 지극한 정조가 부왕 장조(莊祖:장헌세자)의 능침(陵寢)인 화산릉(華山陵)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 행궁에서 쉬어갔다. 당시에는 봉수당(奉壽堂)과 경룡관(景龍館)·복내당(福內堂)·유여택(維與宅)·노래당(老來堂)·신풍루(新豊樓)·남북군영·강무당(講武堂)·무고(武庫)·수성고(修城庫)·집사청(執事廳)·서사청(書史廳)·비장청(婢將廳)·우화관(于華館)·득중정(得中亭)·행각(行閣) 등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화성행궁의 주건물인 봉수당에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이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훼손되고 낙남헌(洛南軒)만 남게 되었다. 봉수당의 원래 이름은 정남헌인데, 정조가 모친 혜경궁 홍씨 (경의왕후)의 회갑연을 이곳에서 베푼 후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봉수당으로 불렀다. 낙남헌은 봉수당 북쪽에 있던 ㄱ자 건물인데 노래당과 함께 곱은 ㄱ자형으로 배치된 초익공(初翼公) 양식의 팔작지붕 집인데, 지금은 꺾인 부분이 잘리어 없어지고 一자형의 건물로 바뀌었다.1975년 화성 복원 결정과 함께 행궁 복원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1996년 화성축성 200주년을 맞아 수원시가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복원공사를 시작하였고, 2003년 7월 말 봉수당, 득중정, 궁녀와 군인들의 숙소 등 482칸의 복원을 완료한 1단계 공사가 끝났다. 이어 10월 9일 화성행궁 21개 건물 중 18개 건물과 정조의 영전(影殿)인 화령전 등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는 개관식을 가졌다.

2010년까지 이어질 2단계 사업에서는 신풍초등학교가 위치한 우화관과 맞은편에 위치한 별주, 내포사 등 화성행궁의 나머지 3개 건물 94칸과 행궁담장 등을 복원하여 세계적인 관광지로 조성할 계획이다. [두산백과사전]

 

 

 

   ▼ 수원화성박물관에 전시된 화성 모형

 

 

 

 

 

 

 

 

 

 

 

 

 

 

 

 

 

 

 

 

 

 

 

 

 

 

     

 ▼ 봉수당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 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1789년(정조 13) 8월 19일 상량하여 같은 해 9월 25일 완공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철거된 것을 1997년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봉수당(奉壽堂)이라는 건물 이름은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으로 정조가 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며 지었으며, 뒤에 돈령부지사를 지낸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이 편액을 썼다. 1795년(정조 19) 이곳에서 헌경왕후의 회갑연인 진찬례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두산백과]

 

 

 

 

 

 

 

 

 

 

 

 

 

 

 

 

 

 

 

 

 

 

 

 

 

 

 

 

 

 

 

 

 

 

 

    화홍문

수원화성의 북수문이며 남북으로 흐르는 수원천의 범람을 막아 주는 동시에 방어적 기능까지 갖추고 있다. 화강암으로 쌓은 다리 위에 지은 문이다. 7개의 홍예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지어져 있으며 누각의 건축면적은 52.89㎡이다. 누상에 오를 때에는 좌·우 측면에 있는 돌 계단을 이용한다. 7개의 홍예문 중에 중앙의 1칸만이 높이와 폭이 크고 나머지는 모두 같다.

수문의 바깥쪽에는 철전문을 설치하여 적의 침투를 막았다. 7개의 수문을 통하여 맑은 물이 넘쳐 흘러 물보라를 일으키는데, 현란한 무지개가 화홍문을 한층 더 아름답게 한다. 이를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수원 8경 중에 하나로 꼽는다. 1794년(정조 18) 음력 2월 28일 터 닦기 공사에 착수하여 1795년(정조 19) 정월 13일 문루가 준공되었다. [두산백과]

 

 

 

 

 

 

 

 

 

   ▼ 방화수류정(동북각루)

1794년(정조 18) 수원으로의 천도(遷都)를 위하여 화성(華城, 사적 제3호)을 축조할 때 그 성곽 위에 꾸며졌던 정자와 누각 가운데 하나이다.

수원성의 북수구문(北水口門)인 화홍문(華虹門)의 동쪽에 인접한 높은 벼랑 위에 세워져 있는데, 亞자형의 평면구성을 하고 있는 정교한 건물로서 뛰어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 정자의 이름은 중국 송나라의 시인인 정명도(程明道)의 시 중에서 따왔다고 하며, 현판의 글씨는 김기승(金基昇)이 썼다. 현재 정자 아래 성 밖에 해당하는 자리에는 용연(龍淵)이라고 하는 못이 있고, 못가에는 돌로 만든 용두(龍頭)가 남아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동장대

연무대라고도 한다. 지형상 높은 곳은 아니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험하게 높이 솟아 있는 곳으로 동쪽구릉인 선암산(仙巖山)의 요지이자 성 중에서 지휘소를 설치할 만한 요충지이다.
3단으로 쌓은 대가 있고, 3층의 대에서는 총수(銃手)가 숨어서 쏘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한가운데에는 좌우에 와장대(臥長臺)를 설치하고 흙을 판판하게 하였으며, 바닥을 돌로 깔아 말을 타고도 장대에 올라갈 수 있게 하였다. 장대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의 합각기와지붕이다.

건물 주변에는 터를 넓게 잡아 동서 80보,  남북 240보 규모의 조련장(操鍊場)을 만들었다. 부속사(附屬舍)는 창고로서 정면 4칸 측면 1칸의 단층 3량 집이다. 성벽 밖으로 돌출된 노대(弩臺: 서노대)를 세웠는데, 이곳은 쇠뇌를 쏘는 군사인 노수(弩手)가 머물던 곳이다. 1795년(정조 19) 7월 15일 묘시(卯時 6시)에 터 닦기 공사에 착수하여 8월 10일에 상량하고, 8월 25일에 장대 건물을 완공하였다. [두산백과]

  

 

 

 

 

 

 

 

 

      ▼ 국궁체험장

 

 

 

 

 

 

 

 

   ▼ 화성 노대

수원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 등 2개의 노대가 있는데, 노대란 원래 공격해 오는 적을 향해 높은 위치에서 쇠뇌를 쏠 수 있도록 구축한 진지였다.

화성 노대는 이곳에 올라 적들의 공격 상황을 측후하여 지휘소와 성 전체에 오방색 깃발 등으로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동북노대는 창룡문과 동북공심돈의 중간에 동북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반달 모양의 담장으로 보호하고 있다. 전돌을 쌓아 네모 모양의 대로 만들었는데 모서리를 깍아 모를 없앴다.

서장대 옆에 있는 서노대는 팔각형이며 사각 받침대 안에 쇠뇌를 설치했다고 한다. [두산백과]

 

 

 

 

 

 

 

  ▼ 창룡문

창룡문은 화성의 동문으로 1795년(정조 19) 건립하였다. 건축양식은 돌로 쌓은 홍예문 위에 단층문루를 세우고 밖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한쪽이 열려 있는 옹성을 쌓은 구조이다. 이후 6·25전쟁으로 문루와 홍예가 크게 소실되었으나 1975년 다시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하였는데, 홍예의 규모가 서로 달라 내홍예는 높이 4.8m이고, 외홍예는 4.5m이다. 문루는 6칸 규모로 내외 3포에 이익공(二翼工) 건물이다. 창룡문의 외성인 동옹성은 높이 2.9m, 둘레 17.2m이며 가까운 곳과 먼 곳을 겨냥할 수 있는 총안 14개가 나 있다. 창룡문 왼쪽에는 축성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문 부근에는 연무대와 활터가 있다. 편액은 판부사 유언호(兪彦鎬)가 썼다. [두산백과]

 

 

 

 

 

 

 

 

     ▼ 수원화성박물관

수원화성박물관은 세계문화유산 화성의 역사와 문화를 총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으며, 화성을 찾는 방문객에게 보다 효과적이고 체계적인 안내와 정조시대 문화융성의 모습, 더불어 화성의 우수성을 알려주는 전문박물관이다. 화성은 18세기 전 세계 군사건축물의 모범이자 조선시대 성곽문화의 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단순한 성곽이 아닌 도시 전체이기도 하다.

화성박물관은 수원신도시 건설과 화성을 축성한 정조(正祖)의 사상과 정신을 포함하여 화성 축성에 참여한 인물,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영(壯勇營)군사, 그리고 정조의  8일간의 화성행차를 통해 각종 문화행사를 모형과 유물을 통하여 전시하고 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 화성봉돈

화성 성벽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화강석으로 기초를 쌓고, 윗부분은 벽돌로 성벽보다 높게 축조하였다. 내면은 굴곡이 지게 하여 3층으로 만들었으며 5개의 화두를 곡선 형태로 쌓았다. 적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포혈과 총안을 갖추었고 봉수군들이 사용할 구들방과 창고 등도 마련하였다.
 
봉수군들은 화성 행궁과 주변을 정찰하다가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을 피워 위험을 알리는 신호를 보냈는데, 화성시 장안면 흥천대 해봉으로부터 봉담읍 건달산의 간봉(間烽)을 받아 용인시 석성산(石城山) 육봉(陸烽)으로 전달하였다. 신호체계는 남쪽 첫번째 화두부터 시작하여 평상시에는 밤낮으로 봉수 1개를 올리고, 적군이  국경 가까이 나타나면 봉수 2개, 국경에 이르면 3개, 국경을 침범하면 4개, 전투를 시작하면 봉수 5개를 모두 올렸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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